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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비버 Oct 23. 2024

[유강]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뜻

사직원을 올렸다. 내 인생에도 이런 순간이 올 줄이야.

인사시스템에서 사직 신청을 하려고 보니 사직 사유를 구체적으로 적으라는 안내가 있었다.


사직 사유라... 내 진짜 사직 사유가 뭘까?

급여 수준, 근무조건, 인간관계 등등 다양한 예시가 있었지만 이거다! 하는 게 없었다.


회사에 정이 떨어지게 만든 동료 직원이 문제인지, 내가 고작 이 돈 받고 이 고생을 해야 해?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급여 수준이 문제인지, 가족도 친구도 하나 없는 이 도시가 문제인지, 내 성향과 가치관에 전혀 맞지 않는 업무가 문제인지… 하나를 고르려니 고를 수가 없고 다 적으려니 걔가 사직 사유를 이렇게 썼더라 하고 뒤에서 수군댈 직원들이 눈에 보여서 이렇게 적었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일신상의 이유란 건 대충 이런 뜻이지.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로 사직하겠다.


하지만 그 의미로 적지는 않았다. 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적었다.

내가 이제 와서 누구누구가 절 괴롭혔어요. 뒤에서 제 욕을 하고 다녔어요. 억울하게 지적을 받았어요. 질문을 못 하게 화를 냈어요. 가스라이팅을 했어요. 본인 잘못을 제가 잘못한 것처럼 말하고 다녔어요. 이러는 건 좀 그렇잖아.


그렇게 쓴다고 위에서 내 편을 들어주겠어? 어차피 나는 나가는 사람이니 남은 직원을 감쌀 게 뻔하다. 그리고 걔네는 자기는 그런 적 없다면서 나에 대해 또 이상한 말을 전하고 다니겠지.


항상 어떤 느낌이었냐면 말이야. 내가 예시를 들어볼게.


내가 길을 가다가 주머니에서 뭘 뒤적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휴지를 바닥에 떨궜다고 생각해봐. 나는 그걸 모르고 계속 길을 걸었어. 그러면 그걸 뒤에서 보고 유강씨 휴지 떨어졌어요 하고 알려줘서 내가 바로잡을 수 있게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난 뒤에 날 갑자기 자리로 불러서, 직원들 다 있는 사무실에서, 유강씨, 길에 쓰레기 좀 그만 버려. 유강씨 그러는 거 내가 다 봤어. 누구누구도 봤대. 왜 그러는 거야? 이러는 거지.


딱 이 패턴이다.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항상 내가 악의를 가지고 행동한 것처럼 몰아갔다.


해명을 하려고 하면 유강씨는 말로 손해를 너무 많이 봐. 말하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 하면서 해명도 못 하게 했다. 하지만 난 걔네가 그런다고 해명도 안 하고 넘어갈 사람은 아니어서 해명을 하긴 했지. 


근데 이게 반복되니 회사에 정이 떨어지는 것이다. 돈이라도 많이 주면 그래도 돈은 벌어야지 하면서 계속 다녔을 텐데 공기업 월급이 뻔하지 뭐. 만족할 수 없는 급여였다. 퇴근하고 가족들이나 친구들을 만나서 걔네가 이랬어! 하고 하소연이나 할 수 있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 도시는 내 고향과는 너무 멀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했다. 사실은 만족하지 못하면서, 그래도 이런 점은 괜찮지 하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건 이제 지겹다. 입사 후부터 줄곧 그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내 자신을 속여왔지만 이제 나는 나에게 속지 않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목표를 이루고 말 것이다. 


꼭 성공해서 나의 불행을 바라고 있는 그 자격지심 덩어리에게 한 방 먹여줘야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식 전할게. 아니다 지금도 내 SNS 감시하고 있으니까 굳이 소식 전할 필요도 없겠구나. 그냥 합격했다고, 다 네 덕분이라고 SNS에 감사 인사 올리면 되겠다.

 근데 이거 비꼬는 거 아니고 진심이다? 네가 꾸준하게 괴롭혀준 덕분에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으니까. 결국 내가 목표를 이루게 된다면, 네가 내 인생의 은인인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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