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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비버 Oct 23. 2024

[뜨카] 지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종착역까지 달릴 수 있는 숭고함

서울 지하철 1호선에는 급행열차가 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운행해 주어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승객들에게 효자 노릇을 제법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급행열차가 승객들을 옭아매는 능력이 대단하다. 바로 특정 시간에만 배치된 급행열차 시간표 때문이다. (그럼에도 급행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청역에서 오후 5시대 급행열차를 타려면 5시 13분 열차를 타면 된다. 그날도 지하철 시간표 애플리케이션으로 미리 급행열차 시간표를 확인해 놓고 부리나케 역으로 향했다.


분명히 5시 땡- 하면 하던 일을 접고 시청역으로 향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옆 사람 앞사람을 포함해 여기저기에 인사를 하다 보니 시각은 어느새 5시 3분을 넘기고 있었다. 5시 4분에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시청역 9번 출구 앞에 도착하니 5시 10분. 3분 안에 지하철을 타는 플랫폼까지 내달릴 수 있을까?


속으로 열심히 시곗바늘을 돌리며 역사 계단을 내려가는데, 아뿔싸! 9번 출구는 2호선에서 가까운 곳이니 내가 타려는 1호선 열차를 타려면 시청역 1호선 승강장까지 걸어가야 한다. 아무리 잰걸음으로 걸어도 5분 이상은 넉넉히 걸리는 거리다. 특히 마의 계단을 넘어야 하는 구간까지 고려하면 중간에 힘이 빠지는 것을 고려했을 때 6-7분은 잡아야 한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시간 계산을 두드려가며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겼는지만, 아직 2호선 승강장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때 시계는 벌써 5시 13분을 넘기고 있었다.


타려던 열차의 출발 시각을 다 아는 상황에서 그 시각을 넘겼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람은 보통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선택을 한다. 하나는 어차피 놓친 열차이니 이왕 늦은 것 느긋하게 다음 열차를 기다릴 겸 걷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혹시 열차가 연착했을지 모른다는 천만분의 일쯤 되는 확률에 베팅하며 걷는 속도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다. 평소의 나였다면 전자를 선택하여 여유를 즐겼을 터인데, 그날은 목적지로 빠르게 향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는지 후자를 택함과 동시에 뛰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수준에서 최대로 속도를 올렸다. 1호선 개찰구를 통과해 승강장에 내려설 때 시각은 이미 5시 18분이었다. 예정된 시각보다 5분이나 늦은 상황. 아무리 열차가 연착을 한다고 해도 그 열차를 탈 확률은 정말 만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 만의 하나가 정말 일어났다! 승강장에 도착하자마자 열차 운행 상황을 알려주는 화면 속에서 내가 타려고 했던 열차가 전역을 출발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이후 몇 초 지나지 않아 그 열차가 도착해 승객들을 내려주고 동시에 태우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숨 고를 틈까지 얻어 가며 기분 좋게 그 열차에 탔다.


당연히 앉을 자리 없이 붐비는 열차 내부였지만 급행열차를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리고 동시에,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목적지까지 달릴 이 열차의 숭고한 의지에 감탄했다. 어쨌든 이 열차는 차고지를 출발하였으니 목적지까지는 무조건 가야 한다. 설사 예정된 시각보다 늦더라도 열차는 결코 달리는 길의 여정에서 중간에 무턱대고 멈춰버리거나 다른 선로로 이탈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각 역마다에서 자신의 속도를 조절해가며 마지막 역까지 내달린다.


5분 넘게 연착한 급행열차가 구로역 차고지 위 선로를 지날 때 나는 생각했다. 아, 어쩌면 내 매일의 일상도 이 열차와 같다면 언젠가는 나의 목적지에 도달하겠구나. 하고자 했으나 끝내 완수하지 못한 일들, 하고 싶었으나 차마 시작조차 하지 않은 일들, 그리고 나의 의지와 체력의 부족을 핑계 삼아 찢어버린 지키지 못한 계획표들... 이전과 달라지겠다며 다짐했던 할 일과 목표들을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해나갔더라면,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그 포기하지 않음이 쌓여 만든 지금의 나는 퍽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어차피 망친 계획 돌아보지 않겠다는 알량한 완벽주의에 빠져 내가 원했던 목표에서 오히려 더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학제를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이정표 삼는 한 해의 시작, 3월을 맞이하여 나는 급행열차의 숭고함을 겸허히 수용하고자 한다. 차고지에서 출발한 이후 지나쳐온 수많은 역들에 미련을 두기보다는, 나아가야 할 목적지까지의 여정에 대한 집중을 말이다. 포기하지 않고 매일 꾸준히 해나간다면, 설사 그것이 계획된 시간에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더라도, 어쨌거나 나아감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닿지 않을까? 그리고 그날 나를 태워준 급행열차의 기관사님, 지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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