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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비버 Oct 23. 2024

[롱울] 일상 속 오디션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한때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 빠져 지낸 적이 있다. 오디션 프로가 주는 즐거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매회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지금은 '나는 솔로' 애청자다).


참가자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구성되는데, 아이돌 데뷔 평균 연령이 딱 그 정도인 걸 감안하면 그들에게는 오디션이, 꿈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한창 헤매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서른이 된 지금 그 친구들을 돌이켜 보면 성공보다는 실패가 익숙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단념보다는 도전이 요구되며, 어렵게 용기 낸 이들을 위해 비판보다는 관용이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참가자들과 또래였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던 것처럼, 모니터 너머 참가자들 또한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제작진이 의도한 감정선을 충실히 따라가며 일부 편집된 장면에서 보인 실력과 태도가 그 사람의 전부라고 믿었다. 실력도 좋은데 주변 사람까지 챙기는 참가자, 기대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아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참가자, 자포자기한 참가자, 남 탓하는 참가자…. 좋은 모습이든 그렇지 못한 모습이든, 사실은 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적인 면모였다.


하지만 시청자의 투표로 데뷔조를 결정한다는 명목 하에, 아직 준비되지 않은 참가자가 실력이 아닌 간절함에 호소하며 다음 라운드 진출을 욕심내는 것이 조금은 못마땅했던 것 같다. 분명 소속사에서 트레이닝을 받거나 연습생 판에 있다 보면 자신의 객관적인 위치를 알 텐데, 그럼에도 제 몫이 아닌 자리를 탐내는 이유가 뭘까 의아해하면서.


시간이 흘러 그들의 대장정도 막을 내렸다. 같은 무명에서 출발했지만 누군가는 단숨에 일약 스타가 되었고, 또 누군가는 문턱에서 고배를 마시며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결과를 전부 납득한 건 아니지만, 애청자로서 한 가지 직감한 바는 있었다. 이들 중에 태반은 앞으로 다시는 방송에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MC는 이것이 끝이 아닌 시작이라며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지만, 몰입감은 이미 최종 우승자를 확인한 순간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패널로 나오는 우승자들을 보며 그들의 달라진 인생을 실감할 뿐, 타인의 치열한 생존 경쟁을 관찰하는 구경꾼 노릇은 그만두고 평범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 후 몇 년이 지났다. 우승자들 중에 일부는 방송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또 일부는 더욱 입지를 다져 톱스타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도 학생에서 직장인이 되었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한 번뿐인 삶이 좀 더 풍요롭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방송사 채용 문을 두드렸고, 감사하게도 구성원이 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은 소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낯선 세계였다. 치열한 경쟁 현장을 담는 카메라 뒤는 더 치열하고 냉혹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이 있듯, 기본적인 수면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인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책잡히기 싫어서 늘 긴장해 있으면서도 집단 이기심과 고압적인 자세에 쉽게 분노가 차올랐다. 무엇보다 살아남기 위해 싫은 모습에 동조하고 변해가는 나 자신이 마음에 안 들었다. 뭐, 책임자는 내 퇴사 사유를 워라밸 불만족 한 마디로 정의하더라. 그렇지만 이 글에서 해묵은 이야기를 꺼내려던 건 아니다.


그때 난 한 오디션 프로의 기획 단계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루는 지원자 명단에서 몇 년 전 다른 아이돌 오디션 프로에 출연했던 한 참가자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에 한 번, 그리고 그 친구가 아직도 이 판을 떠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몇 년 전, 나이에 비해 실력이 괜찮다는 평가는 받았어도 주목받는 참가자는 아니었다. 여느 참가자들처럼 앞으로 방송에서 볼 일이 없을 거라 단정지었는데. 가능성이 없다 재단했던 사람이 계속해서 자기 세계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목표 의식을 잃고서 독기만 가득했던 나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다.


얼마 안 있어 한 사건을 시발점으로 퇴사 결심에 불씨가 피어올랐다. 어렵게 얻은 기회이지만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이제는 그 옷이 탐나지 않을 것 같았다. 도망치듯 방송사를 뛰쳐나와 한동안 오디션 프로를 멀리하고 지냈다. 기획에 참여했던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내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지냈다.


시간이 지나 프로그램은 종영했고 새로운 직장에 적응한 나에게도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문득 데뷔조는 어떤 친구들이 됐을지 궁금해졌다. 개중에는 프로그램 참가자 선발 오디션 현장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눈빛이 반짝이던 몇몇 친구들도 있지 않을까 궁금해하면서.


그런데 데뷔 멤버에 그 친구가 있었다. 몇 년 전 다른 아이돌 오디션 프로에 출연했던 참가자. 잠깐의 검색으로도 그 친구가 올라운더로 좋은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 강한 거라더니. 좋은 의미에서 내 선입견을 깨준 사례였다. 지금도 그 친구 이름을 기억하며 방송에서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경험은 그 자체로 결과일 수 있지만, 또 다른 경험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결과를 확인한 시점에서 멈출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가치 판단에 달려 있다.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일지는 시간이 답해주겠지. 그렇지만 적어도 일상 속 오디션을 치르느라 늘 지쳐 있는 나 자신, 그리고 내 또래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사람 사는 모습이 제각기 다르고, 어쩌면 나를 포함한 누군가는 성공, 도전, 관용보다 실패, 단념, 비판이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이 강한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꽤나 강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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