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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비버 Oct 23. 2024

[롱울] 동물의 숲에서 받은 거울 치료

불호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비로소 호도 많아지지 않을까

새로운 집단에 들어가 자기소개를 할 때면 서로 의례적으로 주고받는 질문이 있다. 이름, 나이, 사는 지역, 직업, 취미. 초면인 사이에 물어도 크게 실례가 되지 않는 질문. 이마저도 개인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스몰토크를 위한 스몰토크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줄 수밖에.


그런데 여기에 최근 들어 반가운 대화 소재가 하나 추가되었다.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직장을 옮기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았는데, 내 또래 집단에서는 어김없이 MBTI 질문을 받았다. 참 쉽고 편리한 도구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알아갈 때 가장 궁금한 요소가 성격인데, 이를 대놓고 묻거나 평가하는 것은 자칫 실례가 될 수 있지만, MBTI라는 간접적인 질문으로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학생일 때부터 서른이 된 지금까지, 인터넷에 있는 약식 검사에서도 유료로 받은 정식 검사에서도 매번 같은 MBTI 결과를 받아봤다. 나를 10년 이상 지켜본 친구들이 내 MBTI를 대신 검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ISFJ.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꽤 흔한 유형이라지 아마.


ISFJ를 인간관계 측면에서 풀어보면 이런 특성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잘 지내려는 중립적인 성향(IS)이 있어 조화를 중시하고 타인에게 잘 맞춰주다 보니 착하다, 예의 바르다, 배려심 깊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 선악을 분명하게 판단하는 성향(FJ)도 있어 상대가 선을 넘는다고 판단되면 조용히 거리를 두기 때문에 계산적이다, 가식적이다, 속을 알 수 없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모순된 두 가지 성향이 충돌하다 보니 평소에도 머릿속이 복잡하고 내면의 대화도 많다. 그렇지만 이건 나 혼자만 피곤하면 될 일이고, 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가기에 나쁘지 않다는 자부심은 있었다. 크게 모난 구석도 없겠다, 서로 선만 잘 지킨다면 대외적으로 다툴 일도 없을 거다. 그래서 나는 나와 비슷한 성격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마음이 편해서 좋았다. 호불호가 갈리는 것보단 불호를 덜 만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 확신이 흔들리게 된 건,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이전 회사를 생퇴사하고 이직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한 달간 '모여봐요 동물의 숲'을 300시간 플레이하며 동숲 세계관에 푹 빠져 지냈다. 나만의 섬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며 나만의 유토피아를 열심히 꾸려나갔다.


내 섬에서 가장 소중한 건 단연 주민들. 주민은 섬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물 NPC로 강아지, 고양이, 토끼부터 악어, 고릴라, 코뿔소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귀여운 친구는 귀여운 대로, 못생긴 친구는 못생긴 대로 각자의 매력이 있어서, 내 섬에 데리고 살 수 있는 주민 수가 최대 10명이라는 게 늘 아쉬울 정도였다.


이 친구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건 단지 외형만은 아니었다. 주민들은 총 8가지 성격으로 나뉘는데, 주민의 성격에 맞게 특색 있는 대사가 출력된다. 먹보, 운동광, 무뚝뚝, 느끼함, 친절함, 아이돌, 성숙함, 단순활발. 직관적인 이름 그대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성격 유형이다. 주민들이 다양한 성격으로 구성될수록 서로 다른 성격 간 상호작용으로 대화가 더 풍성해지고, 지켜보는 즐거움이 배로 커진다.

주민을 영입하기 위해 처음 대화를 나눈 순간 바로 알아차렸다. 나는 8가지 성격 중 친절함의 전형이구나. 누구에게든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조금 과할 정도로 예의를 차린다. 내가 그 모습을 취할 때는 몰랐는데, 정작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니 이렇게나 속을 알기 어려운 성격도 없더라.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얘 지금 나한테 의도적으로 벽을 치는구나. 나와 이 정도의 거리감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가 보다.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갔는데 형식적인 답변만 돌아왔을 때의 좌절감이란. 왜 이 친구는 나에게 사회생활을 하는 걸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공적인 관계로 만났으면 분명 선호하는 성격이었을 것 같은데, 적어도 동숲 세계관에서는 내가 기대한 상호작용이 아니었다.


반면에 내 최애 주민은 외형도 성격도 개성이 뚜렷한 친구들이었다. 무뚝뚝한 고양이 밴덤과 단순활발한 핫핑크 사슴 제시카. 말을 예쁘게 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서투른 진심이 묻어나 오히려 더 진정성 있게 느껴지는 무뚝뚝. 톡 쏘는 말투로 속마음을 시원시원하게 내비치는데 그 솔직함이 무례하지 않은 단순활발.

재미있는 건, 나에게는 커다란 벽이 느껴졌던 친절함이 누군가에게는 무해한 힐링이 되기도 하고, 무뚝뚝한 주민은 아무리 귀엽게 생겨도 정이 안 간다는 사람도 있다는 점이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유형도, 모두에게 미움받는 유형도 없다. 나와 비슷하면 비슷한 대로, 다르면 다른 대로 매력이 있다.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상호 간의 호의를 전제로 순수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숲 세계관. 이곳에서 매력을 느끼는 성격 유형이 어쩌면 내가 가장 좋아하고, 또 닮고 싶은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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