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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비버 Oct 23. 2024

[뜨카] 검은 물을 다시 맑게 하려면

일단 내다 버리는 것은 멈춰 보세요

언젠가 아는 어른에게 최근 겪는 어려움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한 적이 있다.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내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내 잘못을 고백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나를 향해서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조언을 해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그는 돌연 내게 질문을 던졌다.


"컵에 깨끗한 물이 가득 차 있어요. 그런데 그 컵에 검은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예상치 못한 돌발 질문에 당황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답을 했다.


"물 전체가 까맣게 물들겠죠."


"그럼 그 물을 다시 깨끗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번에는 또 무슨 질문인가. 컵에 물이 반이나 들었네, 반밖에 안 들었네 하는 류의 심리테스트는 들어봤어도 검게 물든 물을 다시 맑은 물로 바꾸는 방법을 묻는 심리테스트는 못 들어본 거 같은데. 1초에서 2초 정도 되는 짧은 정적 사이 머릿속으로 그가 원하는 답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여기는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자리니까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말하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컵에 든 물을 모두 내다 버린 다음, 깨끗한 물로 다시 채우면 됩니다."


내 대답이 끝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당신의 인간관계는 그랬던 거예요. 잘못되거나 틀어진 관계는 끊어내고 내다 버렸던 거죠. 더러워진 물을 깨끗하게 하려면, 그 컵에 맑은 물을 계속 부어 넣으면 됩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다시 그곳에 담긴 물이 깨끗해질 때까지 말이에요. 사람 사이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나는 그의 이 말을 들었을 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나의 지난 삶과 인간관계가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식이 새어 나왔고, 이후 그의 말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잉크가 퍼진 물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그 방법을 향해서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비단 인간관계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었다. 한 점의 검은 잉크 때문에 컵에 든 물을 전부 쏟아버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어렸을 때를 돌아보면 나는 꽤나 완벽주의자였다. 많이들 하는 경험이겠지만, 쉬운 것을 예로 들면 공책에 필기를 하다가 글씨를 틀리거나 색깔 펜을 잘못 사용했을 때 잘 쓰던 공책의 한 페이지를 다 뜯어버리는 경우는 아주 흔했다. 오죽하면 공책을 하도 뜯어대서 쓰던 공책을 다시 펼쳤을 때는 원래 새 공책의 절반 정도 페이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이든 친구든 누군가와 다툼이 있어 서로 감정이 상해 있으면, 나는 절대 먼저 상대에게 말을 거는 걸지 않았다. 자존심이었는지 아니면 망쳐버린 관계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는지 이제는 어렴풋하여 기억나지 않으나, 어쨌거나 나에게는 어그러진 관계를 먼저 회복하고 돌이킬 용기도 힘도 없었다.


망쳐버린 한 글자 때문에 공책의 한 장을 아예 뜯어 버리는 버릇은 이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라 엉망진창으로 쓴 글씨로 가득한 수첩도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내 삶의 많은 부분들에서 여전히 어릴 때의 그 버릇을 본다. 특히 직장에서든 개인적으로든 어떤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나는 지레 포기하는 쪽에 가깝다. 추진하던 일이 어느 한 부분에서 막혔을 때, 전날 세웠던 알찬 계획을 저버리고 늦잠을 자버렸을 때... 어느 한 부분이 어그러지는 순간 나는 그때까지 애써 쥐어왔던 것들을 손쉽게 놓아버린다. 어차피 안 될 것, 어차피 지키지 못한 것, 이제 와서 할 게 뭐야.


하지만 나는 이제 분명히 안다. 계획하던 일을 중간에서 놓아버리는 순간 그 일을 하기 위해 보냈던 시간들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아침에 늦게 일어나버렸다는 이유로 하루의 계획을 모두 다음날로 미뤘을 땐 늦잠을 자버린 그 순간보다 훨씬 더 큰 후회와 자책을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나라는 사람의 컵에 담긴 물에 검은 잉크가 떨어질 때마다 이렇게 다짐하려고 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이 물이 다시 투명하게 빛날 때까지!'


지금 내 곁에 머무르는 사람들과 앞으로 내게 다가올 새로운 사람들에게만큼은 끊임없이 깨끗한 물을 붓는 용기와 꾸준함을 가져볼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대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마음이 아프고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나는 그에게 다정함과 편안함이라는 물을 계속 가져다가 부어야 할 것이고, 야심찬 계획이 늦잠 때문에 무너졌다면 그냥 눈을 뜬 시간부터라도 열심히 그날 하루를 채워나가면 된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 관계, 나 혼자서 아등바등 노력하는 관계에 수없이 치이고 상처받았던 날들도 분명히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상, 성공을 가져와야만 하는 벅찬 과제들이 함께 하는 것 또한 물론이다. 그리고 이런 날들은 앞으로도 분명히 내 삶 위에 놓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소중히 여기고 싶은 사람들,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그저 놓아버리고 싶지는 않다. 한 번의 어긋남과 부딪힘으로 끊어내버리기에는 그 사람과 만들었던 반짝거리는 순간들과 이루고 싶은 나의 모습들이 참 많다. 그들이 문득문득 수면 위로 떠올라 얼굴을 들이밀 때마다 그것이 반짝이는 정도만큼 내 마음에는 상처가 새겨지는 느낌이 든다. 그럴 바에야 엉켜버린 검은 물컵에 깨끗한 물을 한 컵 더 붓는 수고로움을 선택하겠다는 뜻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처음의 그 투명한 물의 색깔로는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해버린 검은 물을 조금이나마 맑게 할 수 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관계에 대한 미련은 덜어질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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