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사이다를 원한 적은 없는데요, 저는 콜라 좋아하는데요.
4월 중순의 어느 날, 갑자기 블로그에 올린 퇴사일기 조회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분명 회사사람들 같은데 갑자기 왜 또 퇴사일기를 읽으러 왔나 했는데 순간 지금이 부서이동 시즌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맞다. 이번에 A가 이동 대상자였지. 그래서 또 읽으러 왔구나.
퇴사 직전에 소문이 다 난 줄 알았는데 부서이동을 앞두고 다시 소문이 돌았는지 멈춰있던 블로그 조회수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A에 대해 뭐라고 썼는지 확인하러 온 것 같았다.
처음 조회수가 오른 걸 확인했을 땐 아 그 선배 부서이동 좀 힘들 수도 있겠는데? 생각하고 그냥 웃고 넘겼다. 그런데 며칠 안 지나서 옛 직장 동료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동대상자들이 내 얘기를 꺼내면서 그 부서엔 A가 있으니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더라. 다들 A 핑계를 대며 가지 않겠다고 하니 부장님이 A를 꼭 내보낼 테니 우리 부서에 와달라는 얘기를 하셨다고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A를 내보내야 사람이 들어오는데 A를 어디로 보내겠냐고. A의 희망부서에서도 내 얘기를 꺼내며 A를 안 받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결국 A는 사무직의 유배지라 불리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솔직히 좀 놀랐다. 내 기억에 A는 일을 잘했거든. 비슷한 연차 중에 그만큼 일 괜찮게 하는 직원이 별로 없을 텐데 안 데려간다고? 싶었다. 나한테는 못살게 굴었지만 윗사람들한테는 잘하니까, 구성원들이 연차가 좀 있는 부서에서는 받아줄 줄 알았거든. 얼마 없는 에이스를 그런 유배지로 보낸다니, 회사에서는 일을 잘하는 것보다 성격이 모나지 않은 게 더 중요한가 싶었다.
사실 난 A가 사내에서 그렇게까지 배척당하는 걸 바라지는 않았다. 내가 입은 상처를 배로 돌려주는 걸 원한 게 아니다. 그걸 원했으면 사직원에도 그 인간 때문이라고 적고 퇴사 전 면담 때도 그 인간을 물고 넘어졌겠지. 인사팀 찾아가서 읍소를 했겠지. 난 그저 내 평판을 깎으려고 안달이 난 것처럼 별것도 아닌 걸로 트집을 잡고 가스라이팅을 하던 A의 평판에 작은 흠집을 내주고 싶었다. 잊을만 하면 생각이 나는 찝찝한 흠집.
그런데 웬걸. 동기 말로는 흠집 수준이 아니라 평판이 그냥 박살이 나버렸다고 한다. 아니 난... 그렇게까지 대단한 복수를 원하진 않았는데?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하다가, 내 글은 그저 기폭제였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속으로는 그 인간을 싫어했는데 굳이 말 꺼내기 뭐해서 속으로만 생각하다가 내 글을 핑계로 티를 내기 시작한 거 아닐까? 내가 아주 좋은 참고자료를 제시해줬잖아.
내가 블로그에 글을 쓰기는 했지만 회사 이름이나 부서명, 그 인간의 이름 같은 건 하나도 적지 않았다. 입사지원서에 적었을 때 말고는 한 번도 밝힌 적이 없는 내 메일 주소를 알아내서 블로그에 들어온 게 아니면 내 퇴사일기를 볼 수가 없다. 사람들이 퇴사일기 같은 관련 키워드가 아니라 내 블로그 이름을 쳐서 글을 읽으러 들어오더라니까?
그러니까 처음에 내 블로그를 염탐했던 사람이 그 인간들을 감싸줄 의도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그 인간들 엿 먹으라고 내 블로그 주소를 퍼뜨려 버린 거다. 소문이 왜 계속 퍼지겠어? 중간에서 감싸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퍼지지. 걔 그럴 애 아니야 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는 거지. 그래도 나보다 3년이나 더 그 회사를 다녔는데, 왜 자기 편 하나 제대로 만들어놓지 못했을까. 난 솔직히 내가 사회성이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고 동기들 말고는 친한 사람이 아예 없었어서 그래도 사람들이 걔 편을 들어줄 줄 알았다. 나는 떠난 사람이라 마음껏 욕해도 알 길이 없으니까 걔를 감싸줄 줄 알았다고.
A야,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았니? 네가 그렇게 대놓고 면박주고 가스라이팅 하지 않았으면, 아니 질문할 때마다 화를 내더라도 제대로 답변을 해주기만 했어도 나는 널 그냥 까칠하지만 일 잘하는 선배 정도로만 말하고 다녔을 거야. 날 얼마나 호구로 봤으면 퇴사한다고 했을 때도 사과 한 마디 없었을까. 주변인들이 방관하지 않았으면 너도 그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겠지? 네가 그렇게 된 건 나도 참 안타깝게 생각해. 근데 그래도 피해자는 나니까 너는 억울해 하지마. 나는 너 괴롭힌 적 없잖아? 유배지에 있는 동안 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번 제대로 돌아보고 반성하길 바라. 가면 쓰고 본성 숨기고 살다보면 옛날 이야기는 잊혀질지도 모르니까 계속 노력해보고. 다시는 후배 만만하게 보지 말고. 상사는 너네보다 먼저 퇴직하지만 후배는 퇴직하는 그 순간까지 봐야한단다. 중간에 퇴사하면 나처럼 다 까발리고 나갈 수도 있단다.
누가 좀 말리기라도 했으면 저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주 사람을 망쳐놨네. 내가 그냥 바락바락 대들어줄 걸 그랬나? 아 몰라. 이제 퇴사했는데 무슨 상관이람. 더이상 그들의 소식을 듣고 싶지 않다. 그냥 나 괴롭혔다가 평판 박살난 선배들로만 기억할래.
이 글을 나중에 몇명이나 읽게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 독자 중에는 가해자나 방관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도 있을 거다. 심한 폭언이나 폭행을 하지는 않았더라도, 문제 삼기엔 애매하고 잊고 털어버리기엔 너무나 꾸준한 괴롭힘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날 괴롭힌 선배들이 딱 그랬거든.
글을 읽으면서 피해자인 나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도 좋지만, 혹시 본인은 후배를 괴롭힌 적이 없는지, 그동안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괴롭힘을 방관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글은 독자들에게 사이다를 주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맹세코 나는 이렇게까지 톡 쏘는 사이다는 원한 적이 없다.) 회사마다 한 명씩은 꼭 있는 A들 정신차리라고 쓴 글이다. 부디 나는 아니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넘기지 않았으면 한다. A선배와 신입 유강씨는 어느 회사에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