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최근에 '고민중독'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고민과 중독.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 두 익숙한 단어의 조합이 전달하려는 의미가 명확해서, 이미 사전 어딘가에 등재된 합성어를 보는 것 같았다. 짝사랑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밝고 경쾌한 멜로디로 풀어내긴 했지만, 당사자는 아마 미칠 지경이겠지.
노래 가사처럼 짝사랑 때문에 괴로운 건 아니지만, 나 역시도 지독한 고민 중독자다. 그래서 한때 농담처럼, 나는 고민이 취미인 사람이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하곤 했었다.
고민이란 녀석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수시로 머릿속을 들락날락거리곤 하는데, 그중 출현 빈도가 높은 건 미래에 관한 고민이다. 나는 정해지지 않은 미래로 마음이 불안할 때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내가 여기서 뭐 더 할 건 없을까?
한때는 이런 고민에도 유효기간이 있어서, 지금의 고비만 잘 넘기면 고민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대학 입시가 끝나고 나니, 정작 내가 마주한 건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현실의 장벽이었다.
졸업하고 뭐 해 먹고살지? 사회 나가서 밥벌이는 할 수 있을까?
이래서 어른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 안 해도 될 때가 가장 좋았다고 말씀하신 걸까. 순수 학문을 전공으로 선택한 19살의 나, 그런 와중에 복수전공에서조차 살길을 마련하지 않은 21살의 나 덕분에 졸업 이후 삶의 난이도는 급상승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대학원을 졸업하면, 직장에 취업하면, 이직에 성공하면… 끝도 없는 가정을 수정해 가며 눈앞에 닥친 과제를 하나씩 달성해 나갔다. 그래도 20대는 인생의 과도기라니까, 고통스럽긴 해도 남들도 다 이렇게 사나 보다 싶었다. 매 순간 치열하게 살지는 못했어도, 꾸역꾸역 버텨가며 주저앉지는 않았다.
그렇게 서른이 되었다. 올해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새로운 직장. 그동안 불안정성을 이유로 이직을 반복했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정착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확신이 있었다. 간만에 별다른 고민 없이 마음 평온한 상태가 두세 달 지속되었다. 스무 살 때 이후로 자그마치 10년 만이었다.
그러나 현업에 투입된 후 내부인의 시각에서 현실을 마주하자, 그동안 철저히 외부인으로서 상황을 낙관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간다고 해서 자동으로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결국은 살아남기 위해 업무적으로든, 업무 외적으로든 모두가 애쓰며 고통을 감내한다.
다만 고통의 정도도, 스트레스 역치도 사람마다 다르겠지. 남들에게 피해 안 끼칠 정도로 중간만 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 중간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떤 일이든, 어떤 환경에서든 중간은 갈 수 있다 자신했는데, 자존감이 바닥으로 치달아 도통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이 마지막 직장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더 옥죄는 걸지도 몰라.
다시 불확실한 미래로 시선이 향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고민 중독 상태로 빠르게 돌아갔다. 어차피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걸 알면서도, 고민을 내려놓지 못해 자신감은 떨어지고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불과 몇 달 만에 생긴 변화에 씁쓸하면서도 반복되는 패턴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분명 새로운 환경에 적응 중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고민인데. 그 고민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다 못해 확대 해석해서 결국 고민에 짓눌리고 마는 건 내가 나약한 탓인 것 같았다.
고민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불안에서 오는 고민은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주니까.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고민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수시로 찾아오는 고민은 가볍게 흘려보낼 줄도 알고.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한 뼘 쑥 자라 있지 않을까? 비록 성장 속도는 더딜지라도, 쉽게 포기하거나 지쳐 뚝 부러지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