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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비버 Oct 23. 2024

[유강] 날갯짓

근데 이제 태풍을 곁들인

블로그에 올린 나의 퇴사일기(한풀이쇼)에는 나를 힘들게 했던 선배들 이야기가 한 사발 들어있긴 하지만, 쓰지 않은 내용도 매우 많다. 날 힘들게 했던 것이 어디 선배들 뿐이겠으랴. 같이 일하는 A 님도 한몫하셨다. 툭하면 지각에, 점심시간 후에는 어딘가로 사라져서 1시간씩 자리를 비우고, 바쁜 시즌에는 나와 분담해서 일을 해야 함에도 그게 전부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든 것을 내가 혼자 처리하도록 내버려두셨다. 성격은 좋은 분이라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시는 분이었지만 당연히 본인이 하셔야 하는 일을 매번 내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부탁하는 것도 스트레스여서 두세 번 정도만 부탁드리고 그냥 전부 떠안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제출해야 하는 자료가 1,000건이면 그중 50건 정도 하셨달까? 물론 나머지는 전부 내가 처리했다. 그렇지만 나의 퇴사일기 한풀이쇼에는 그저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적었다. 정말 사소한 기억 때문이다.


햄스터를 키우는 나를 위해 A 님이 일본여행에서 선물로 사온 햄스터 인형. 내 선물만 사왔다고 하며 슬쩍 건네주시던 그 기억 때문에. 그 일 하나로 A 님은 나의 폭로에서 저 멀리 비껴가셨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은근 정이 많다고. 

근데 그럼 왜 선배들 이야기는 그렇게 했게? 그런 사소한 추억이 하나도 없으니까. 마지막까지 사과도 안 하니 굳이 감싸줄 필요가 없었지. 글 내려달라 했으면 내려줬을 텐데 무슨 똥고집인지 그런 부탁도 안 했잖아? 두 마리 나비 둘 다 날갯짓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바람 한 점 불지 않지요.


퇴사일기를 올린 지도 벌써 반년 가까이 지났으니 이제는 직원들이 내 블로그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며칠 전부터 누가 자꾸 퇴사일기를 읽고 가더라고. 회사 사람이 아니면 절대 생각하지 못할 키워드로 내 블로그를 검색해 들어와서 퇴사일기들을 쭉 읽고 가더라고. 누군지 알 방법이 없지만, 설마 하며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내 자리로 가게 된 B 대리님, 제발 그 분만은 아니길 바라고 있다. 


퇴사했으니 다른 직원들이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란 걸 알지만, 나의 퇴사라는 작은 날갯짓이 불러온 태풍이 아무 죄도 없는 B 대리님을 덮친 걸까봐 마음이 좋지 않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나에게 7월부터 10월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었고, 특히 작년 7월에는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한꺼번에 일이 몰려서 너무 힘들었다. 만약 내 자리로 가게 된 대리님이 지금 내가 겪었던 걸 그대로 겪고 있으면 어떡하지? 내가 일을 분담해서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올해도 A님이 B 대리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있으면 어떡하지? 일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전임자는 뭐라고 썼나 확인하러 내 블로그에 들어온 거면 어쩌지?


아무나 내 자리 와서 엿 먹어보라는 생각을 하며 퇴사를 하진 않았다. 후임으로 누가 올지 정해지지 않아 직접 인수인계를 하지 못하고 가는 게 미안했다. 또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직원을 내 자리에 앉힐까봐 걱정이 돼서 퇴사 전에 A 님께 내 자리엔 과장급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려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내 업무는 그렇게 힘든 업무가 아니라서 과장이 오지 않아도 된다는 대답이었다. 본인은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않았으니 그렇게 느끼겠지. 다른 그룹사에서는 내 업무를 과장·차장들이 하던데, 짬이 낮으면 타부서에서 협조를 안 해줄 때마다(=매일) 뭐라 항의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아야 하는 업무인데. 


부디 B 대리님의 상황은 다르길 바라고 있다. 내가 유난히 미련한 사람이라 그렇게 힘들어했던 것이길, B 대리님은 혼자서 떠안지 않는 분이길, 비협조적으로 구는 사람이 없길, 현업부서 담당자들이 알잘딱깔센으로 자료를 작성해주길.


나의 날갯짓이 불러온 태풍이 부디 죄지은 놈들만 덮쳤기를 바란다. 그리고 태풍에 휘말린 사람들이 결국은 살아남기를 바란다. 정말 그럴 의도가 없었거든. 나는 이제 아무에게도 악감정이 남아있지 않으니까. 

 앞으로 살면서 수만번은 더 하게될 나의 날갯짓이 태풍이 아닌 꽃향기를 불러오는 날갯짓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날갯짓으로 꽃향기를 맡는 럭키유강이 되기를 바란다. 난 꿀 빨면서 살고 싶어. 태풍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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