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살아왔다.
요즘 들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크게 웃었던 게 언제였지?”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웃을 일이 없었던 것도 문제였고,
웃었으면서도 기억을 못 한다는 건
더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고향 친구들과 지내던 시절에는 정말이지 배가 아프게 웃었던 적이 많았다.
학교 가는 길에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가 빵 터지면 그거 가지고 하루 종일 웃고 또 웃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반 친구들 이야기, 텔레비전 이야기 동네사람 이야기...
소재는 무궁무진했고 늘 배가 고프면서도 아팠다.
뭐 좋은 일만 있었을까 마는 확실한 건 정말 배가 아프게 많이 웃었던 건 그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웃어보려고 해도 그 시절의 웃음과 닿을 수 없는 느낌이다.
예전 사진을 꺼내보니 그 속엔 친구 한 명, 선배 두 명, 형이 있다.
시골 학교 정원에서 찍은 사진인데 지금은 폐교가 되어 민간에 팔렸다.
사라진 줄 알았던 과거가 실제로 사라진 ‘공간’이 되어 있었다.
과거의 공간이 폐교가 되었듯 중년의 나 또한 직장에서 폐교가 된 건 아닌지 싶다.
젊은 시절엔 반짝거리는 곳에 서 있었고 존재의 중심을 차지한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MZ세대에게는 낡아 보이고, 상사들에게는 더 이상 새롭지 않고,
가운데에서 누구와도 온전히 연결되지 못한 채 애매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남겨진 교실처럼 문이 닫힌 공간처럼 사람들 속에서 떠 있는 느낌이다.
중년의 직장은 떠들썩한 운동장을 건너 텅 빈 강당에 들어온 기분을 준다.
한때는 시끌벅적했던 공간이 지금은 고요해지고 비어버렸다.
LP를 틀고, 카세트를 모으고, 옛 영상을 보고, 필름을 현상하고, 사진을 뒤적이고
글을 남기는 이유는 결국 하나다.
그 시절의 웃음을 지금으로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레트로는 취미가 아니라 소생술이다.
잃어버린 나를 깨우는 방식이고, 폐교가 된 마음에 불을 켜는 행위다.
중년은 비어버린 것이 아니라 다시 채우고 있는 중이다.
학생이 떠난 교실처럼 고요할 뿐 그 안엔 여전히 이야기와 노래와 기억이 남아 있다.
중년은 그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웃음을 찾는 나이.
과거의 웃음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품고 새로운 미소를 배우는 나이.
그래서 지금이 아프고,
그래서 지금이 아름답고,
그래서 지금이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폐교도, 폐허도, 빈자리의 공간들도
다시 찾아가면 기억은 숨을 쉬고 웃음은 되살아나고 추억은 나를 다시 살게 한다.
책상 위의 LP 턴테이블은 단순한 오디오가 아니다.
과거의 기술로 현재의 감각을 듣는 순간 시간의 층위가 포개진다.
노래가 흘러가는 동안 과거의 청춘과 현재의 마음과 미래의 감각이 하나의 소리로 이어진다.
아이들이 박스 안에 들어가 웃던 사진은
시간이 어떻게 존재를 바꾸는지 말해준다.
“시간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사진은 그 질을 붙들어둔다.
“기억은 저장되지 않는다. 계속 생성된다.”
그래서 기억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카페의 숫자를 세고 댓글을 남기고 백업을 하고 이야기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관계가 사라지면 존재도 흔들린다.
그러니 기록하고, 남기고, 연결하고, 소통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한 방식이다.
“나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그래서 레트로나이는 행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철학이다.
잃어버린 테이프를 후회하는 마음은 물건 때문이 아니라 기억 때문이고
LP를 듣는 이유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기 위해서이며
아버지의 음성을 기억하려는 마음은 과거가 아니라 존재를 잇기 위한 시도다.
중년은 되돌아가는 시기가 아니라 성찰의 시기다.
나를 향하던 화살표가 더 이상 ‘앞’만 가리키지 않는다.
시간은 미래형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추억과 가능성이 한데 얽혀 하나의 원형처럼 돌아온다.
우리는 이 나이에 와서야 알게 된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는 것을.
흘러가듯 보이지만 사실 맴돌고 있고 그래서 다시 만난다.
다시 듣고, 다시 느끼게 된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이 사라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잃어버린 웃음 대신 웃었던 날의 음악을 찾고,
사라진 청춘 대신 반짝이던 감정의 잔향을 붙잡고,
흩어진 관계 대신 온몸으로 연결돼 있던 시절을 떠올리고 싶어진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고 존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기억은 쌓이는 것이 아니라 계속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지금이 더 깊고, 더 넓다.
중년은 잃어가는 나이가 아니라 흐릿했던 나를 선명하게 매만지는 나이.
미래에게 쫓기던 삶이 기억에게 기대어 쉬어가는 나이.
속도를 내던 시절이 지나 속도를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나이.
그리고 무엇보다 —
“나는 잘 살아왔다”는 사실을 조용히 확인하는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