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어느 날 불쑥 그런 날이 온다

by 꿈꾸는 momo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을 베개 삼아 누워있으면 뒹굴거리던 세 아들이 하나 둘 조용히 잠에 빠져들고 나 역시 어느 순간 덜컥 잠의 늪으로 떨어진다. 내 배에 올라타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무릎을 접어 비행기를 태워달라던 녀석들을 재우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것 같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아이들의 발 끝에 차이지 않기 위해서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안 그러면 어느 녀석의 발에 안면을 정통으로 가격 당할지 모른다. 그렇게 같이 누워 아이들의 잠을 기다리는 순간에는 도무지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다가도 수직 낙하하듯 잠에 떨어지는 순간이 온다. 사람이 철드는 순간도 그런 것 같다.


철이 들던 어느 날의 나도 그랬다.

등굣길, 여느 때처럼 함께 가던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친구가 빨리 나오지 않는다 생각하며 발 밑에 걸리적거리던 돌멩이를 툭툭 쳤다. 그러다 문득, 이유 없이 내 발에 걷어 차인 돌들이 클로즈업되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세상 한가운데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막막함과 외로움 따위의 정서가 몰려왔다. 이 땅의 수많은 돌들만큼 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나는 뭐지? 그러고 보면 너무도 평범한 존재인 거다. 어쩌다 걷어차여도 상관없는 무의미한 존재... 갑자기 세상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것은 너무 적었다.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이를 테면, 친구들 간의 편 가르기, 쉬는 시간마다 꺼내는 불룩한 공깃돌 주머니, 새로 산 수첩 따위...

학급 임원이었던 나는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실 때면 선생님의 전용 막대로 교탁을 탕탕 두드려가며 엎드려! 하고 으름장을 놓던 아이였다. 키득키득 거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책상에 엎드려 칠판에 이름이 적히지 않으려 애썼다. 키보다 목소리가 크던 나였는데 이런 행동들이 갑자기 유치하고 부끄러워졌다. 5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조용히 내 할 일에만 몰두하는 척했다. 친구들이 너무 떠들 것 같으면 단체기합을 받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자 설득했고 앙숙처럼 틱틱거리던 남학생들에게도 여자 친구 부르듯 성을 빼고 이름을 불렀다. 성별이 다르면 딱딱하게 구는 현재의 방식이 너무 유치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의 야유나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애벌레가 고치를 만들기 시작하듯 이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어디 아프냐는 말을 듣다가 착해졌다는 말이 들리고 어느 순간 '착한' 아이로 각인되어 버렸다. 조용한 것과 착한 것과는 별개지만 별달리 항변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제2의 '나'가 되었다.


철이 들면서 보였던 게 부모님의 뒷모습이었다. 엄마의 촌스런 옷도, 아빠의 낡은 오토바이도 예전과 다른 느낌으로 눈에 들어왔다. 원수처럼 싸우던 오빠와는 남이 된 것처럼 말도 섞지 않았다. 굴러가던 낙엽에도 까륵까륵 배꼽을 잡고 웃던 유년시절을 지나 나와 내 주변의 것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며 얼굴이 붉게 사춘기를 맞았다. 숨기고 싶은 붉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단발머리를 커튼처럼 내리고 다녔고 굵은 뿔테 안경을 꼈다.


엄마는 친구들보다 일찍 붉은 얼굴로 붉은 꽃잎을 떨어뜨린 내게 생리대와 위생팬티를 사주셨고 시내 헌 책방에서 소설책 두 권을 골라 건네셨다. 제인 에어, 테스... 나는 전래동화, 세계명작동화, 위인전 같은 장르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나 아주 비밀스럽게 책들에 파묻혀 지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의 낯설고 우울했던 성장의 길목을 새롭게 여행할 힘을 선물해 주셨던 건지도 모른다.


낮에 하원 후 아이들과 함께 걷던 길에서 우르르 스치며 만난 남자아이들이 떠올랐다. 과격한 몸짓과 말투로 감정을 표현하는 중학생 아이들의 대화방식을 보며, 놀이터 바닥을 차지하고 딱지치기에 몰입해 있는 남자아이들의 힘 겨루기를 보며 나의 '어느 날'과 아이들의 '어느 날'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방문을 닫고 대화를 피한다면, 새로운 시선과 감정으로 흔들리고 혼란스러워 한다면, 나의 가치판단과 달라 부딪히는 날이 온다면... 어느 날, 단단한 뼈와 굵은 목소리로 자라 있을 나의 세 아들이 벌써부터 어색하고 낯설다. 그때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로 서 있어야 할까, 이 시커먼 녀석들에게 나는 무엇을 선물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벌써부터 어렵다. 세 아들은 그런 일은 없을 거란 듯이 아무렇게나 엎드리고 구부러져 잠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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