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오는 마음
폐병을 앓고 난 후부터 '마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저장소가 심장이 아니라 폐와 연결이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생각을 하곤 한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할 때처럼 왼쪽 가슴에 손을 대던 마음을 이제는 왼쪽 등이라 가리키고 싶은 것이다. 폐가 양쪽에 있으니 억측일지 몰라도 마음이 움직일 땐 꼭 거기, 흉관을 뚫었던 자리가 신호를 보낸다. 마음이 즐거울 땐 맑은 기운이 호흡을 가볍게 하지만 마음이 불편할 땐 그 자리도 함께 불편하다. 뭔가 뾰족한 것이 뚫고 나올 것 같이... 흉관을 끼운 자리의 살이 벌어지지 않도록 생살에다 스템플러를 박아야 한다며 무자비한 도구를 내 눈에 들이미는 의사에게 뇌가 먼저 기겁을 해서인지 예리한 스템플러의 심이 툭툭 다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병을 진단하고 환부를 도려내고 회복을 기다리듯, 나와 연결된 새로운 이들의 안녕을 물어보는 것부터 어쩌면 뼈아픈 아픔이 시작되는 것이다. 상대의 아픔을 발견하고 함께 울고 함께 싸우는 시간이 절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하물며 내가 감당할 만큼인지도 알지 못한 채로, 머뭇거리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며 문을 두드려 보는 거다. 평화가, 사랑이 그저 완성된 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때로는 말랑말랑한 마음으로, 때로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때로는 불편한 마음으로 말을 걸어보는 것이다.
반 아이들 가정으로 일일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통화연결음이 뚜루루 뚜루루할 때도 있고 듣기 좋은 노래가 흘러나올 때도 있는데 그 몇 초의 순간은 어쩔 수 없이 긴장된다. 아마 수신을 확인하는 상대의 그 순간도 같지 않을까. 발신번호가 담임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잠깐 주춤하지는 않을까. 짧은 안부와 몇 마디의 주고받는 말이지만 소리로 들려오는 마음이 있다. 소리의 음색과 말의 속도, 그리고 아이에 대한 몇 가지의 정보 만으로도 알아차려지는 부모의 양육태도나 분위기가, 아이에 대한 짐작들이 있다. 그러면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나 말의 온도에 내 마음도 고무줄처럼 탄성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삶의 무게가 너무 커서 고단해 보이는 목소리, 불안과 희망 어느쯤의 터널 앞에서 흔들리는 목소리는 내 마음을 덩달아 무겁게 만든다. 그래서 머릿속에 더 깊이 새겨지는 아이들의 이름이 있다.
이렇게 차례차례 목소리를 확인하는 일은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사흘 동안을 그렇게 통화하며 나는 잠시 조용해졌다. 아직 만나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전해주는 아이들의 희미한 실루엣을 느끼며 그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 낼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잠시 침묵하는 거다.
코로나의 불안만큼 찌푸렸던 하늘이 모처럼 맑다. 바람은 불어도 햇살이 좋아 잠시 세 아들을 데리고 둑길을 걷는다. 피부에 닿는 햇빛과 그 온기는 차게 부는 바람 속에서도 느껴진다. 둑길에 올망졸망 피어난 봄까치꽃들이 무채색의 배경을 새롭게 한다. 이 와중에도 봄은 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