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필요한 것
바나나가 있어야 했다. 딱 하나면 충분했다.
비는 지칠 줄 모르고 내린다. 빗소리에 잠을 깼으나 날이 어두워 눈을 한 번 더 감았던 게 실수였고, 야채가루를 뿌려 동그랗게 말아주던 밥을 아이의 요구에 유부피에 넣게 된 게 실수였다. 부랴부랴 세수를 한 후 로션에다 선크림만 대충 바르고 나서려는 길, 빈 속이 아우성을 쳤다.
냉장고를 열었다. 들고 갈 만한 게 없다. 과일이 보관된 김치냉장고를 열었다. 복숭아와 토마토가 전부다. 이 시점에 무른 복숭아 껍질을 벗기고 잘라가는 것도, 토마토를 씻어 잘라가는 것도 바쁘다. 먹다가 옷에 튀기라도 하면 하루가 꿀꿀할 것이다. 오늘은 공개수업이니. 간식바구니를 열었다. 거기엔 한 두개 꺼내먹고 남은 젤리며 사탕같은 단 것들이 뒹굴고 있었다. 아이들 손이 닿지 않는 비밀장소라 안 보여서 못 먹는 것들. 누가 준 것들인지, 언제 샀는지도 모를 달콤하고 알록달록한 것들이 탈출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못본채 문을 닫았다. 결국 빈 손으로 나와야했다.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차량 와이퍼의 속도를 최대로 작동시키고 앞차가 튀기는 물세례에 깜짝 깜짝 놀라며 운전을 했다. 무엇보다도 배가 고팠다. 뭐라도 먹어야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연구실 냉장고를 열었다. 먹을 게 없었다. 결국 생수 한 통을 들고와 벌컥벌컥 물배를 채우고 수업을 준비했다.
바나나 한 개만 있으면 충분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많은 음식과 맛있는 요리도 아니고 냉장고에 비축된 수많은 식재료나 냉동식품도 아니다. 바나나 한 개만 있으면 되었다.
그 날 나는 퇴근 길에 굳이 과일가게를 들러 바나나 한 송이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