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초월적 존재에 대한 망각
약방 권사님
병원이라고는 돌팔이 의사라고 불리는 늙은 의사가 있는 의원이 전부였던 시골, 우리 동네에는 의원보다 인기 많은 약방이 하나 있었다. 흰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가 운영하시던 그 곳은 언제나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잔병치레가 많았던 나도 약방의 단골손님이었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권사님이기도 했기에 나는 할머니를 약방 권사님이라 불렀다. 워낙에 단정하고 차가운 분이시라 직접 불러본 적은 거의 없지만. 사람들은 약방 권사님에게 진맥을 받고 약을 지어 가곤 했다.
약방 권사님이 약을 지어주는 과정은 참으로 볼만한 광경이었다. 알약을 약절구에 직접 빻아 가루로 만들어 주던 시절이었다. 약방 권사님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약절구에 있는 가루를 정사각의 흰 약포지 가운데 분배했다. 일정한 양의 가루가 약포지 가운데로 탁탁탁 리듬을 맞춰 떨어지는 게 하도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면 삼각 모양이 나오게 반으로 접어올린 약포지 양끝을 맞물리게 접고 남아있는 한쪽 모서리를 그 사이에 끼웠다. 그 약포지들을 서로 포개어 올려 약 봉투에 넣어주면 끝이었다.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이 작업과정은 곧 약방 권사님의 진단과 처방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배가 아프다고 보채는 날 데리고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또 약방을 찾았다. 약방 권사님은 그날따라 나를 방으로 들어오라 권하셨다. 가게에 딸린 방으로는 처음 들어가 보는 것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장롱 하나와 낮은 책장이 전부였는데도 말이다. 약방 권사님은 방 가운데 나를 눕히고 배를 꾹꾹 눌러보기 시작하셨다. 그 손에서도 약 냄새가 났다. 낯선 방 안에 가득한 쓴 내에 가루약을 억지로 넘긴 것처럼 기분도 썼다. 사탕이 먹고 싶었다. “간이 부었네.” 한참 내 배를 만지시던 약방 권사님의 한 마디였다.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권사님은 코끝으로 흘러내린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시며 병원을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어린 내게 내려진 이 진단은 아버지를 많이도 당황하게 했던 것 같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지만 아버지의 불안감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날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일기를 썼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시한부 선고의 충격을 나도 조금 알 듯했다. 얼마나 비장했으면 그날에 펼쳐 놓은 오른쪽 면의 일기장 내지가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다. 제목은 '간이 부은 날'이었다. 환자복을 입고 병실생활을 하는 창백한 나를 상상했다. 동정과 연민이 느껴지는 그 소녀가 살짝 마음에 들기도 했다. 3학년 꼬맹이의 비장한 일기를 읽으시던 담임선생님은 웬일인지 허허 웃으시며 “괜찮을 거야”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아이고 어린 것이, 어쩌누
인근 도시의 병원으로 가는 길부터 멀미 때문에 힘들었다. 엄마, 아빠는 말이 없었다. 뱃속을 촬영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마셔야 한다며 의사 선생님이 컵을 내밀었다. 흰 색의 끈끈한 액체였다. 평소 같으면 도저히 넘길 수 없는 역겨운 맛이었지만 나는 고분고분하게 그것을 받아 마셨다. 촬영실 앞 대기실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예닐곱 명 있었다. 대기실에 있는 TV화면에는 시커먼 물체가 꿈틀대고 있었다. 안에서 촬영 중인 누군가의 뱃속인가 싶었다. 내 이름이 불리고 아빠와 함께 촬영실로 들어갔다. 어두침침한 공간에 거대하고 투박한 촬영기계가 놓여 있었다. 나는 속옷만 입은 채로 의사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기계에 누웠다. 맨살에 닿는 기계의 차가움 때문인지 긴장해서인지 와들와들 떨렸다. 촬영을 끝내고 나오자 대기실에 있던 어른들이 “아이고 어린 것이, 어쩌누”하며 걱정을 보탰다. 대기실에 있던 엄마의 표정이 어두웠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었다. TV화면에는 누군가의 위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내 이름이 호명되고 진료실로 들어간 우리는 의사 선생님이 걸어놓은 촬영 사진을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짧은 침묵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변비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장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두 개의 덩어리를 가리키셨다. 맥이 탁 풀렸다. 나는 부끄러웠고 엄마, 아빠는 웃었다. 변비와 신경성 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변비와 신경성이라는 말을 삭제한 “위염”이라는 병명만 기억하기로 했다. 친구들과 선생님이 물으면 그렇게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약방 권사님의 오진이라는 것이 확증된 후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감기같이 알만한 병에 필요한 약이 아니면 약방을 가지 않았다.
죽음의 역설
내게 처음으로 죽음을 직시하게 했던 이 사건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끝났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직면하는 사건들이 무거워진다. 갓 태어난 아이가 수술실에서 생사를 알지 못하는 시간을 다투고 있었을 때, 폐암 진단을 받고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얼마 전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던 대학선배의 갑작스런 죽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친구의 소식. 점점 실제적인 죽음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죽음을 의식할수록 생에 대한 감사와 의미는 더 또렷해져 오늘이라는 하루를 허투루 쓰지 못하게 한다. 물 묻은 도시락 통을 마른행주로 닦아내고 수저를 챙겨 등원 가방에 넣는 일이, 어제 사온 전복을 손질하여 은근한 불 앞에서 죽을 끓이는 일이, 그 죽을 맛있다며 두 그릇이나 먹는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친정아버지가 죽을 좋아하시지 하고 남은 죽을 밀폐용기에 담는 일이, 참으로 고맙고 눈물 나는 때가 있다. 이 일상적인 행위가 얼마나 감사한지 죽음 앞에 설수록 알게 되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는 내가 만나는 사건들이 그저 가벼운 에피소드로 끝나기를 바라거나 남의 고통과 비교하여 상대적인 위로를 얻는 이기심이 뒤섞이기도 한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 날이 맑거나 흐린 것도 상관없이 불쑥 우리 곁에 등장한다. 봉긋한 무덤이 있는 언덕을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 마을에 초상이 나면 어이야~ 어이야~ 상여를 메고 가던 장례행렬을 쳐다보며 죽음을 직시했었다. 죽음과 연결된 초월적인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저 죽음과는 동떨어진 것 같은 햇살의 반짝임과 높푸른 하늘, 계절을 따라 변하는 모든 자연이 우리의 일상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문자로 전해지는 부고와 계좌로 이어지는 부의금으로 죽음은 잊혀 진다. 짧은 장례절차는 장례 기관에 맡겨지고 한 줌의 재로 남는 유골조차 신속하게 눈앞에서 사라진다. 어쩌면 이 시대의 커다란 오진은 죽음과 초월적 존재에 대한 망각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