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1

by 꿈꾸는 momo

“엄마, 할머니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분인 거 같은데, 어찌 살았어요?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는 어땠어요?”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초상집에서 딱히 내가 할 일은 없었지만 학교에 가기 싫어 안 갔다. 다음 날이 어린이날이라 학교에서 선물로 나눠준 초코파이를 친구가 갖다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은 초코파이가 달콤하지 않았다. 모든 게 생경했고, 무섭기도 하고, 지루했다. 할아버지가 계시던 방에 놓인 병풍, 그 너머의 관. 손님이 올 때마다 울음을 뱉어내던 고모들의 곡소리와 향냄새.

할머니 집 지붕 처마 밑에 걸린 할아버지 사진을 볼 때면 그날이 연기처럼 떠올랐다. 저고리에 갓을 쓰고 있는 할아버지 옆에는 한복을 입은 할머니 사진도 걸려있었는데, 두 분은 사진 속에서도 분위기가 참 달랐다.


“할아버지는 정말 과묵한 분이셨어. 선비 같았지. 늘 조용하시던 분이 어느 날 밤에 마당에 있는 장독을 다 깨시더라고.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장독을 다 깨셨을까. 아는 체도 못하고, 나가볼 수도 없었어.”


엄마는 그렇게 시아버지를 회상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요인 중의 얼마간은 할머니 때문이라 확신했다. 보통은 한국 여인들의 가슴에 맺힌 그 한(恨)이 대상을 바꾼 거라고. 그만큼 우리 할머니는 유별났다.


1981년. 엄마는 나를 낳던 날 할머니께 서운하다는 소리를 들으셨다 했다. 두 해 전, 그리도 바라시던 손주를 안겨드렸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내 밑으로 태어난 동생이 남자였음에도 할머니는 별다른 내색하지 않으셨다고. 손자 중 으뜸은 장남이 얻은 첫아들이었던 거다. 할머니에게 오빠는 특별했다. 오빠의 밥상에는 늘 계란프라이가 올라왔다. 밥상 위에는 할머니가 드시는 풋고추 몇 개와 고추장에 찍어 먹는 마른 멸치 한 움큼, 전날 내내 할머니가 탕탕 두드리고 찢으시던 황태채가 고추장에 묻혀 나왔다. 거칠게 입안에서 맴돌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가시가 꼭 내 맘 같았다. 간혹 동생과 나에게도 계란프라이를 줄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동그란 노른자가 예쁘게 살아 따로 한 접시에 담아낸 오빠의 그것과는 달랐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아버지는 할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하셨다. 엄마의 가게 뒤 공터에 아빠의 간이작업실(가축 키우는 걸 그만두시고, 표구사를 운영하셨을 때다)과 세 남매 각자의 방을 임시로 만들어 쓰던 때였다. 남는 방이 없으니 할머니는 나랑 같이 써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할머니에 대한 쓴 기억들이 올라와 싫은 티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자리에 대한 애착이 심했다.


“이거는 내 자부동(방석)이다. 여기 앉지 마라.”


분명 내가 갖다 놓은 방석인데도, 할머니가 쓰기 시작하면 할머니 것이 되었다. 심지어 공공버스 좌석마저도. 할머니는 큰 덩치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무작정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 직성이 풀렸다. 할머니의 이런 행동 때문에 아버지는 웬만하면 어디에 할머니를 모시고 다니기 싫어하셨지만, 오빠의 졸업식 때는 어림없었다. 누구보다 들뜬 할머니는 수많은 인파를 뚫고 당당히 내빈석 의자에 앉으셨다나. 먼저 오신 담당 교사가 "여기는 내빈석이니 학부모들이 서 있는 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했을 때는 강당 안이 울릴 정도의 목소리로 "한이가 우리 손자요! 한이가 우리 손자요!" 하셨다고 했다. 물론 오빠는 할머니가 자랑할 만큼 훌륭한 우등생이었지만, 붉어지는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고 했다. 일방적이기까지 한 할머니의 애정은 상대방을 더욱 냉랭하게 만들었으나, 할머니는 그것조차 상관없는 눈치였다.


할머니와의 동거는 예상외로 편했다. 그건 다른 사람에게 별로 관심 없는 할머니의 성격 덕분이었다. 할머니가 가져온 물건이라곤 옷장 하나와 TV밖에 없었는데도 방은 점점 할머니의 냄새로 가득 찼다. 우리는 그냥 서로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곧, 할머니 방에 내가 얹혀사는 꼴이 되었다. 할머니가 하는 일은 주로 TV를 보는 일이었다. 물론 초저녁부터 그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이 허다했지만, TV를 껐다가 몇 번 타박을 받은 이후로는 그냥 두었다.


“장에 꽃신이 새첩던데.”

“모피코트를 꼭 입어보고 싶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건 숨기지 않고 말씀하셨다. 몸보신을 위해 철마다 단골 한약방에서 한약 한 재를 지어 드셨고, 고뿔에 걸렸다 싶으면 직접 곰국을 끓여 드시는 분이셨다. 엄마는 가끔 한숨을 쉬었지만, 언젠가는 할머니의 바람대로 꽃신이 놓였고, 장롱에는 모피코트가 걸렸다. 겨울철마다 등장하는 할머니의 모피코트를 볼 때마다, 저게 왜 필요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모피코트가 유용할 시기는 드물어 할머니는 그걸 입으실 때마다 팥죽 같은 땀을 흘리셨다. 혹여 다른 사람이 만질까 봐 실내에서는 보자기에 곱게 접어 넣은 뒤 손에 쥐고 다니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겨울마다 볼 수 있었던 모피코트였으니, 30년은 족히 입으셨던 걸로 치자면 돈 값은 넉넉히 한 셈이다.

딱 한 번, 할머니 앞에서 마음의 말들을 토해내며 서럽게 울던 마흔 살의 엄마를 기억한다. 내가 보아도 삭고 삭힌 감정이었다. 할머니는 알이 굵은 옥반지를 갖고 싶다 하셨다. 한 번도 싫은 내색을 않던 엄마의 울음 섞인 말에 할머니는 아이처럼 뾰로통 해 아무 말없이 듣고만 계셨다. 어느 날, 할머니의 손가락에는 굵은 알이 굵은 옥이 박힌 금반지가 끼여 있었다.


장날은 할머니가 유일하게 바쁘신 날이었다. 그날은 호박죽과 장어국을 장만하는 날이었다. 할머니의 호박죽은 흔히 보는 노란색이 아니라 옅은 회갈색 빛을 띤, 아주 달고 걸쭉한 찹쌀죽이었다. 그날은 늙은 호박을 손질하기 위해 펼쳐 놓은 신문지와 조리도구, 할머니를 피해 까치발을 하고 부엌을 다녀야 했다. 호박씨를 숟가락으로 박박 문질러 긁어내고 도마에서 탁탁 썰어내는 소리는 할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스으, 스으’ 소리와 장단을 맞췄다. 장어를 고아 뼈를 체에 걸러낼 즈음에 할머니는 흰색 러닝 차림으로 비지땀을 흘리셨다. 이렇게 마련한 음식은 대체로 한 두 번 가족상에 보이다가 언제나 할머니의 쟁반에만 놓였다. 할머니의 호박죽에 너무 물려서 엄마는 이제 호박으로 한 요리는 다 싫다고 하셨지만, 난 가끔 할머니의 호박죽이 그리울 때가 있다.


나는 그래도 할머니와 꽤나 친한 룸메이트였다. 여전히 오빠를 가장 예뻐하셨지만, 나에게도 가끔 할머니가 아끼는 마른 수리미(오징어)를 찢어주셨으니까. 그런 친분에 못 이겨 할머니를 따라 5일 장에 나선 적이 있다. 기꺼이 할머니의 조수가 되어 짐을 들어드렸다. 그때만 해도 장날이 제법 북적북적하여 구경하는 재미가 났다. 할머니는 생선 파는 노점 골목을 들어가서는 살 듯 말 듯 애를 태우며 가격 흥정에 바빴다. 실로 놀라웠다.


“장어 이거 한 마리에 얼마요.”


이렇게 시작된 할머니의 흥정은 무리한 요구로 번번이 실패했다. 한참 후에야 탕탕 손질에 들어간 장어를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몇 개의 검은 봉지를 손에 쥐고 흔들거리며 장어 손질을 구경하는데, '툭!' 도마에 난데없는 장어 한 마리가 들어왔다. 할머니가 생선 가판대에 있던 장어 한 마리를 집어던진 거였다.


“할매, 이러시면 안 됩니더.”

"새끼 장어 한 마리 끼워주면 되지, 뭐"


주인은 못 이긴 척 마지막 장어까지 손질해 주며 다시 한번 이러면 안 된다, 못을 박았다. 할머니는 물건을 건네받고서야 주섬주섬 줌치를 꺼내 계산을 했다. 그러나 사장님이 몇 번이고 지폐를 세어보아도 건네주는 돈이 맞지 않았다.


“아니, 할매. 천 원 더 주셔야제.”

“에그, 끝 다리는 빼면 되지 뭐 그래.”


할머니는 막무가내로 돌아섰다. 미적거리고 서 있던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미 저만큼 달아난 할머니 뒤를 부리나케 뒤따라 갔더니, 그 사이 할머니는 500원짜리 수박을 하나 사셨다. 맛도 없는 밍밍한 저 수박을 혼자 끌어안고 잡수시겠지. 그날도 어김없이 부엌은 할머니 차지였다. 그 후로 난 할머니와 장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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