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뜨개

by 꿈꾸는 momo

일곱 살쯤 되었나. 엄마는 삼촌 사업장 구석에 내 키만 한 진열장 하나만 달랑 들여놓고 노리개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셨다. 장롱 문고리나 한복 장식이 되는 소품이었다. 보들보들한 비단 천과 매듭을 엮는 화려한 실들은 엄마의 손에서 가지각색의 노리개로 태어나곤 했다. 사무용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회색 공간에 알록달록한 노리개들이 진열된 모습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어색한 풍경이다. 이내 심심할 걸 알면서도 난 고집스레 엄마를 따라나섰다.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는 엄마 옆에서 하릴없이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끝에 달린 술이 살랑거리며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좋았다. 하루 종일 있어도 손님은 드물었다. 지는 해가 점포 안까지 깊숙이 들어오면 엄마는 보따리 장사처럼, 가지고 온 노리개를 싹 쓸어 담았다.


어느 날부터 엄마 손에서는 노리개가 아닌 뜨개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곧 멋진 옷이 완성됐다. 가게를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엄마는 약속된 날짜 안에 옷을 짜느라 밤낮없이 뜨개를 해야 했다. 다섯 식구가 한 방에서 자던 시절, 꺼질 줄 모르는 형광등 불빛 아래서 사각거리는 엄마의 뜨개소리는 자장가였다.


“엄마 어떻게 하는 거예요? 나도 좀 가르쳐줘요.”


대바늘로 코를 잡고 나면 한 올이던 실이 촘촘히 짜여 면을 이루고 앞판, 뒤판, 양쪽 소매가 각각 탄생했다. 그것을 돗바늘로 꿰매 합체하면 옷이 되는 거였다. 그 결과물이 신기해 대바늘을 들고 흉내 낼라 치면 엄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거 안 배워도 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엄마가 동네에서 제법 그럴싸한 수예점을 운영하던 때에도 나는 목도리 하나 뜰 줄 모르는 수예점집 딸로 자랐다. 목도리 뜨기가 유행했던 열세 살의 크리스마스 때에 처음으로 완성했던 결과물은 처참했다. 엉성한 내 손놀림에 중간중간 코가 빠지거나 늘어난 작품은 목을 한 번도 감지 못할 수준에서 결말을 맺었다. 몇 배로 더 길게 짜야할 만큼의 인내심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목도리는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고양이 인형의 이불 신세가 되어야 했다. 내심 엄마의 조력을 기대했던 나도, 수예점집 딸이라는 활약을 기대했던 친구들도 실망했던 사건이었다. 그랬다. 엄마는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딸의 체면을 세워줄 만한 일에도 무심함을 발휘하였다(지금 생각하면 세 남매의 독립심을 키웠던 꽤 훌륭한 자녀교육방식이었지만). 엄마의 그 무심함은 내 예민함과 부딪히며 속에서 반감을 만들어냈다. 대놓고 엄마에게 대들거나 반항한 적은 없었지만엄마에게는 이유도 없이 짜증이 쌓였다. 뜨개옷도 그랬다.


엄마는 새로 나온 실로 옷을 짜거나 새로운 무늬를 선보일 때면 항상 내게 맞는 옷을 짜 입혀주셨다. 그러면 동네 아줌마들은 나를 불러 세워 구경하거나 주문했다. 살아있는 마네킹인 셈이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떠 주시는 옷을 군말 없이 입고 다녔지만 갈수록 뜨개옷이 싫었다. 콧물을 쓰윽 훔칠 때마다 개운하게 닦이지 않는 소맷자락이, 피부에 닿는 부분이 까슬까슬해서 자꾸만 신경 쓰이는 뜨개옷이 싫었다. 지금에야 좋은 원사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때는 가늘고 짧은 원모들이 삐져나오는 저렴한 원사를 썼으니까. 나는 언제 들어갔는지 모를 투명한 원사가 입안에서 거슬리듯 엄마의 뜨개질이 불편해졌다. 엄마가 짜 올리는 뜨개처럼 투박하고 단조로운 생활 리듬이 불편했던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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