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전공은 축산학이었다. 산업 시대의 주축이었던 아버지 세대, 산업대(아버지의 학력란에 기록된 '대졸'은 어린 내게 자랑스러운 사실 이었다)에서 익힌 공부는 돈이 되는 일이었다. 꽤 많은 농가에서 소와 돼지, 아니면 닭이라도 한두 마리쯤 키웠기 때문이다. 애완동물과 반려동물로 존재가치가 격상(호칭만 그러할지도)되기 직전, '짐승'이라는 존재로 키워왔던 그것들은 가계의 밥줄과 연결되는 재산이었다. 그것이 돈이 되려면 번식을 많이 해야 하는데 자연번식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었다. 병에 걸릴 확률도 높았지만, 생산성 면에서도 인공수정보다 성공 확률이 현저히 낮았다. 아버지는 수소에서 채취한 정액을 암소의 생식기 내에 주입하는 방식으로 인공수정을 해 주고 돈을 벌었다. 고객 맞춤형, 찾아가는 서비스가 제공될 수밖에 없던 구조여서 아버지의 일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아버지는 '싸이카'라 부르던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일하러 나가 종일 집에 안 계실 때가 많았다.
당시는 현금거래가 일반적이었으니 우시장이 열리는 날은 돈뭉치를 만지는 날이었다. 인공수정 횟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성실함과 어머니의 알뜰함은 살림을 불렸다. 곧 동네 외곽에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 첫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가축을 키우기 위해 축사도 지었다. 당시에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동네 목수 한 명과 같이 작업 현장에 같이 뛰어들었다 했다. 보루쿠라고 불렀던 시멘트 블록을 쌓아 올리고 미장을 하고, 슬레트 지붕을 얹은 집이었다. 셋째를 임신한 엄마도 건축 현장에 동참했다. 엄마는 그때가 참 힘들었다고 했다. 두 아이(오빠와 나)를 시댁에 맡겨놓고 무거운 몸으로 일하고 돌아가면 애들을 놔두고 왜 빨리 안 왔느냐, 얼른 저녁 안쳐라, 타박이 돌아왔다 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잘 키우자고 하던 때였어. 안 그래도 먹고살기 힘든데 셋째가 들어선 거야. 원하지 않았던 애라, 높은 데서 툭 뛰어보기도 하고, 집 지을 때 일부러 몸을 막 썼지. 그래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거더라. 지금 생각하면 아기한테 미안하지.”
얼굴이 하얗고 예뻤던 남동생이 이런 위기 속에서 태어났다니. 없을 뻔했던 생명의 끈질김과 경이로움 같은 걸 느꼈다. 남동생이 없었으면 내 유년은 얼마나 칠흑 같았을지. 매번 싸우기만 했던 오빠와 달리 남동생은 내 동무나 같았던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니까.
집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는 집이 완성되고도 마당 한 편에는 시멘트포대와 모래가 쌓여있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나는 쌓인 모래 무더기에 오르락내리락하다 신발 안에 잔뜩 모래를 넣고 다니고, 모래 장난을 일삼아했다. 주변이 허허벌판과 다름없던 그 집, 집 앞 언덕 무덤가에서 비료포대를 타고 놀다 심심하면 삐비를 뜯어먹었다. 오빠는 개구리를 매미채에 가득 잡아 나에게 들이미는 장난으로 나의 분노를 지켜보는 걸 재미 삼았다(오빠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끔찍한 폭력이었다). 여름이면 너른 마당에서 발가벗고 빨간 대야에 물을 받아 들어갔다. 차가운 지하수 물에 이를 딱딱거리며 떨다가도 이내 물장난을 치고 앉아 있으면 엄마는 때수건 한 장으로 몸 구석구석을 문지르곤 했다. "저쪽 손! 이제 발!"하고 외치면 내 신체의 일부를 엄마에게 가만히 내밀어야 했다. 개운해진 몸으로 나와 "추워, 추워" 외치며 동생과 이불을 감고 깔깔대곤 했다. 여름밤, 넷이서 누워(아빠는 어디 가셨을까.) 개구리 우는 소리 들으며 잠을 청했지. 유리창에 붙은 청개구리의 하얀 속살을 감상하다 스멀거리며 목으로 기어가던 거미하나에 놀라 소리치던 나. 거미를 잡아주던 엄마. "이제 그만 자." 무표정한 엄마의 목소리. 축사 때문에 외곽에 지은 집은 엄마에겐 고립감, 우리에겐 무료함을 안겨줬던 것 같다. 엄마는 밤이 무섭고 추웠다고 했다.
젊은 날의 아버지는 뭉칫돈을 받을 때면 집으로 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한 거겠지만, 도박판이 커지면서 돈을 잃기 시작하면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잃은 돈에 대한 아쉬움이 계속 발목을 잡았다. 본전만 찾자. 본전만. 시곗바늘은 계속 움직이는데 아빠는 그 자리를 일어나질 못했다. 담배 연기 자욱한 화투판에 애를 업고 찾아가기도 했다는 엄마의 속도 타들어 갔을 거다. 오빠는 어릴 때, 혼자 울음을 삼키는 엄마의 모습을 자주 봤다고 했다.
많은 돈을 잃고, 아버지가 새로운 삶을 다짐했던 건 내가 예닐곱 살쯤 되었던 때다. 내 유년의 장면이 하나 둘 떠오르는 그때쯤. 조각조각 이어진 장면들에 어머니는 항상 흑백의 배경이었는데, 언젠가부터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때쯤 엄마가 일을 시작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