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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화책만 보았다.

by ding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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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들이 무식하다는 소리를 밥먹듯이 들었다.

어릴 때 체육선생님들이 어떤 일을 하다가도 잘못되면 운동만 했으니 뭘 배웠겠어라는 소리를 주변에서 엄청 들었다.

대놓고 다른 과목의 선생님들이 하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필자도 운동선수였다.

그래서 지금도 무식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운동부를 선발하는 모집이 알림판에 프린트되어 걸렸다.

조건은 운동부가 되면 삼각우유와 통식빵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모두 굶고 다닐 때였다.

점심은 부잣집 몇을 제외하고 당연히 굶는 게 일상처럼 되었다.

그런 가운데 삼각우유와 통식빵은 굉장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원하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간절했지만 내가 운동을 잘할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운동부에 지원한 수백 명의 학생들이 대부분 탈락하고 5명을 선발하는데 4명만 선발이 되고 한자리가 남았다.


그로부터 며칠을 감독님이 각 교실을 다니면서 운동을 할만한 애들을 찝어서 개인 테스트를 시켜보고 발탁하는 방식이 된 거 같았다.

어느 날 아침 조회가 끝나고 감독님이 우리 교실에 들어와서는 70명이 넘는 우리 반을 둘러보시더니 야 깜둥이 너 방과 후에 남아서 테스트받아라 하신다.

그때 나는 그가 날 지목한 지를 몰랐다.

옆 친구인지 알고 야. 너야 너. 잘해봐라 했더니, 감독님이 야 깜둥이 너야 이놈아 너. 바로 나를 지목하신 것이다.

방과 후 운동장에 남아서 이런저런 테스트를 받고 나니 감독님이 너 내일부터 운동하러 나와라 하신다.


나는 그때부터 운동선수로 접어들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시키니까 시작을 한 것이다.

우리 집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가난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께서 기술자였기 때문에 밥은 굶지 않았다.

그래서 삼각우유나 통식빵이 꼭 필요치 않았지만 나 역시도 굶는 날이 더 많았고 또 친구들이 안되는걸 나는 한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때부터 새벽에 학교에 와서 운동하고 정규수업을 하고 방과 후 운동을 했다.

정말 무식하게 운동을 했다.

피로가 싸이니 공부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숙제를 못해가서 손바닥 맞는 것이 매일 하는 일처럼 발생했고 종아리 맞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학교 성적도 갈수록 떨어졌다.

운동 전에는 그래도 중간에서 앞선 정도이기는 했지만 운동을 시작하고부터는 저 뒤쪽 꼴찌 쪽으로 갈수록 밀려났다.

운동이 고되고 힘들게 되니 자연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본격적인 선수로서의 길로 접어들었다.

감독님 밑에 전문코치님과 트레이너가 기술을 가르치고 지구력 운동을 시켰다.

그때 필자는 배드민턴 선수였다.

초등학교 때 다져진 체력이 중학교에 와서 기술이 접목되니 기량이 갈수록 올라갔고 나는 그 과정에서 키도 훌쩍 자라서 70명의 반 학생 중에 저 뒤쪽에 앉아서 있을 정도로 키가 커버렸다.

그만큼 체력도 기술도 기량도 급성장해갔다.

중2학년 말에 소년체전 서울시 대표선수 선발전이 있었다.

서울에서 단 7명의 대표선수를 선발하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유일하게 내가 선발되었다.

7명 중에 필자는 5위로 선발되었다.

호기롭게 선수촌에 입촌하여 서울시 대표선수라는 자부심으로 훈련을 시작했는데 일주일 만에 퇴촌당해 버렸다.

소년체전에 나갈 나이가 오버되어 버린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 인생의 최고 기회였는데 나이가 나의 미래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옛날에는 워낙 잘 먹질 못해서 태어나서 바로 호적에 올리는 것을 망설이는 가정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는 일정 부분 성장할 때까지 기다렸다고 호적신고를 한다.

그만큼 태어나 죽는 어린이들이 많았다는 것일 것이다.

어쨌든 필자는 큰 실망을 안고 빈둥빈둥 운동을 게을리했다.

목표가 상실되니 운동할 기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3학년에 올라와서는 간혹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육상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를 했다.

학교 육상부가 있었으나 중장거리 선수가 없어서 배드민턴 선수인 필자가 한번씩 참가하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육상대회에 나가면 입상을 했다. 1등은 못했어도 2등과 3등은 꼭 해왔다.

물론 배드민턴대회에 나가서도 입상을 꼭 해왔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특기자 자격을 육상과 배드민턴을 가지고 있었지만 필자는 배드민턴으로 진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체육주임께서 육상으로 가라고 권했다.

그 이유는 당시 배드민턴은 비인기 종목으로 선수생활을 계속하려면 배 골기 좋다고 육상으로 가라고 하셨다.

체육주임께서도 필드하키 국가대표 선수였는데 정말 비인기 종목의 서러움을 몸소 느꼈기에 육상으로 가라고 했을 것이다.


결국 육상으로 특기자 신청을 했고 배드민턴과는 멀어지게 되었지만 필자의 아버지께서는 운동을 접고 기술을 배웠으면 하셨다.

그래서 1차로 서울공고 육상부에 접수했는데 떨어졌다.

공고에 가서 운동은 접고 기술을 배울 요량이었다.

2차로 한양공고. 3차로 안양공고를 넣어서 다 떨어졌고. 마지막으로 중대부고 육상부에 지원했는데 역시나 떨어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배드민턴 선수가 육상 특기자가 되었으니 검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친구들은 서울체고에 가서 열심히 배드민턴 훈련할 때 필자는 학교가 결정되지 않아 집에서 빈둥빈둥 놀았다.

당시 서울체고 배드민턴 감독님이 배드민턴 서울시팀 감독님이 셨는데 며칠이지만 내가 운동하는 걸 인상 깊게 보신 모양이었다.

내 동료들에게 나의 안부를 물어보셨고 내가 집에서 논다고 하니 당장 서울체고로 오라고 해서 그때부터 서울체고에 가서 배드민턴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인생은 내 맘대로 되는게 아닌가 싶다.

한 달 후 3월이 다가올 때 교육청에서 특기생들 학교배정 점검에서 필자가 누락된 것을 확인하고 일방적으로 필자를 육상부가 있는 숭문고등학교로 배정해 버렸다.

졸지에 필자는 배드민턴 훈련을 하다가 다시 가방을 싸서 마포에 있는 생소한 숭문고로 적을 옮기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육상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숭문고는 육상의 명문고로서 보스턴의 영웅 족패천하의 서윤복 선생님을 배출한 명문고로서 전통이 있는 학교였다.

당시 늦게 왔다고 엄청 맞은 기억이 있다.

숭문고는 사립학교로서 선생님들 자체도 동문 선배들이 많아서 육상부에 대한 배려가 많았다.

그리고 육상부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선생님들도 육상부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고 하니 육상부에 대한 애정들이 대단했다.


필자도 새벽 운동 후 수업만 들어가면 책상에 엎어져 자기 바빴다. 피로하니 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번은 수학선생님께서 자고 있는 내게 다가와하시는 말씀이 만화책을 봐도 괜찮으니 자지 말고 뭐든 읽으라고 하셨다.

운동선수라고 공부 못한다고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뭐라도 읽으라고 하셨다.

필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적어도 무식하다는 말은 듣지 말자 라고 ~~~

그날부터 만화책을 보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만화책을 보고 있으니 어느 날 국어 선생님께서 짤은 에세이 집을 건네시면서 만화책보다는 이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에세이집을 읽으니 좋았다.

재미도 있었고 읽고 나니 기억에도 남았다.

다 읽고 나니 선생님께서 다른 책을 주셨다.

그래서 국어 선생님께서 가져다주시는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다른 수업시간에도 책을 읽었고 선생님들께서도 자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게 좋다고 독려해 주셨다.

정말이지 나의 지식은 고등학교 때 무수히 읽은 그 책들 때문인 것 같다.

대학을 진학하고는 공부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정말 공부를 해야겠다.

늦었지만 무식하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전공을 찾아 열심히 하려고 나름 했지만 기초가 부족하다 보니 다른 학생들보다 더 힘들게 공부했다.

다행히도 필자는 대학원까지 갈 수 있는 행운을 안았다.

그래서 학사가 아닌 석사로서 자식들에게도 당당할 수 있는 아버지가 되었다.


사회에 진출해서도 꾸준히 책을 읽었다.

일주일에 한 권 한 달에 3~4권씩 읽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손에는 책이 있는게 아니라 핸드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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