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하얀 설원 앞에 서면
끝없이 펼쳐진 하얀 설원 앞에 서면
먼저 숨을 고른다
바람이 일어 눈가루를 휘몰아갈 때
그 장관 앞에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그 하얀 세상 위에 손가락 하나를 세워
희망이라는 단어를 적어볼까 하다가
이내 멈춘다
희망은 언제나 쓰이는 순간보다
지워질 때 더 빛난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배웠으므로
설원의 원고지는 칸이 없다
줄도 없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마음은 문장을 만들려고 든다
그리움이라 불러도 좋을
순한 마음의 결을 따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의 희망을
조심스레 그려본다
먹물 같은 설움을 풀어
하얀 바탕에 흘려놓고 싶다가도
설움이 고백되는 것은
연민의 그림자를 데려온다는 걸,
그래서 오늘 하얀 눈밭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기로 한다
깨어나지 못한 말들이
서로의 어깨를 기대어
그대로 숨 쉬게 두는 일
그것도 하나의 기록임을
설원은 하얀 빛깔로 알려준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지난 삶이
그래도 바닥으로 다다르지 않고
아쉬워하면서 어르고 달래고
다독이고 덮어두었다
정해진 과오와 정해진 책임이
습관처럼 돌아오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것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하얀 눈은 말없이 보여준다
내 작은 생각과 나의 문장은
그 깨끗함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쓰지 않음으로써
닿는 문장이 있다
그 영롱한 햇빛
그만큼의 별빛을 받아
홀로 아득해지는 자리에서
나는 나를 내려놓는다
하얀 설원을 보며
나를 돌아보고
그물처럼 얽힌 생각을 풀어
오늘을 건너는 일
그것이 삶의 철학이다
너무 깨끗해서
마음으로만 쓸 수 있는 하얀 세상
설원의 원고지 위에서
비로소 배운다
살아간다는 것은
남겨둔 여백이
다음 발자국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걸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