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은 소유가 아니다

사랑이 앎으로 바뀌는 순간 소유하려 든다

by 현월안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물결 속에서도 부모는 자기 아이를 한눈에 알아본다. 비슷한 가방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어도, 닮은 머리 모양 속에서도 부모는 한눈에 알아본다.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 역시 마찬가지다. 시력이 흐려져도 멀리서 걸어오는 배우자의 모습을 알아본다. 그 얼굴이 낯익고, 그 걸음걸이가 이미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심을 가질수록 더 잘 알아낸다. 그래서 흔히 말한다. 그것은 본능적인 사랑의 앎이라고.



사랑이 전부 앎으로 바뀌는 순간, 사랑은 조용히 익숙해진다. 앎은 편리하다.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고 기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앎 때문에, 어느새 상대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규정하고 통제하는 사람이 된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으로 가두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타고나기를 모든 것이 제자리에 물건이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이는 질서보다 여백이 편안한 사람이 있다. 물건은 늘 손 닿는 곳에 놓아두어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서로 충돌을 한다. 그 둘 속에는 틀림이 아니라 성향으로, 이미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등은 서로의 고집과 서로 자기 쪽으로 이해시키려는 과정에서 사랑이라는 명분을 뒤집어쓰고는 충돌하게 된다.



익숙하게 다 안다는 앎 속에 상대를 온전히 담아두려는 의도와, 사랑으로 이해하려는 오래된 습관 속에 서로 단호히 선을 긋다 보면 일이 커지고 만다. 둘이 하나가 되어 한 곳을 바라보기보다 사랑 안에서도 끝내 둘로 남아 있는 불편한 진실을 서로 놓지 않는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이고 끊임없는 초월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존중하며 더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랑은 쉽게 변한다. 관심을 놓치고 결국 실망을 남긴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사랑하는 이에게 '진심으로 알아가기를 멈추지 말라'라는 말은 상대를 더 성실하게 바라보고 더 정직하게 귀 기울이고 더 깊이 이해하려 애써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 상대의 앎에서도 한 가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아직 이 사람을 다 알지 못한다는 여백이다.



오래된 사랑이 주는 익숙함은 따뜻하지만, 그 익숙함이 상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손쉽게 단정하는 순간 사랑은 퇴색된다. '원래 그런 사람', '늘 그래왔잖아'라는 익숙한 말처럼 들리지만, 때로는 상대의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만다. 상대의 낯섦에 대한 영원한 기대라고 할 만큼 수없이 마주한 모습, 습관과 말투 어느 하나 모르는 것이 없는 모습에서, 예상을 깨고 새로움을 기꺼이 맞이하는 일. 그 새로움이 주는 불편함마저 사랑의 일부로 받아들임이 아닐까 싶다.



특히 부부의 관계에서 익숙함은 다양한 색으로 변색된다. 그 익숙하고 살가운 관계는 때때로 무시하고 마구 대한다. 섭섭함과 속상함, 이해되지 않음이 생길 때 바로 그 쯤에서, 사랑은 무색해진다. 그때 사랑하는 이를 다시 내가 아는 사람으로 밀어 넣을 것인지, 아니면 내가 존중해야 하는 대상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존중을 잃지 않는 관계는 긴 인생길에서 불안을 덮어버릴 만큼 안정을 주고 단단해진다.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상대의 불행과 아픔, 고통을 놓치지 않고 응답할 수 있는 여백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은 쉽게 판단하지 않고, 서둘러 해결하려 들지 않으며, 곁에 머무는 인내를 배운다. 그래서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대를 여유 있게 볼 수 있는 근육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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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익숙함을 넘어 낯섦으로 앎을 넘어 존중으로, 소유를 넘어 동행으로 자라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끝내 다 알지 않겠다는 여백을 배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 여백 속에서 비로소 서로에게, 그리고 삶에게 조금 더 진심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