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말에 익숙하다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60대 남자가 '조력 존엄사'를 하려고 혼자 스위스로 떠나려다 공항에서 멈췄다. 가족에게 문자를 남긴 것이 발견되어 그 남자의 자녀가 112 신고로 공항 경찰의 설득 끝에 멈춰 섰다는 이야기. 스위스행 비행기가 공항에서 지연되었다는 사실은, 이상할 만큼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제 죽음은 병실에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서 계획되는 일이 되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 뉴스가 주는 여운은 깊고도 무겁다.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삶과 죽음을 어디까지 끌고 와버렸는지를 보여주는 일이 아닐까.
삶을 살면서 죽음을 쉽게 꺼내지 않는다. 말해선 안 되는 것 같고, 멀리 밀어두어야 하는 것처럼, 애써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끝없이 밀어낼 수 있게 된 시대에, 죽음을 더 멀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의학의 발달로 생명을 더 연장되고, 그 연장은 다시 고통의 시간도 함께 늘어났다. 살아 있음이 그 어떤 병으로 부담이 될 때, 비로소 고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얼마나 더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디까지가 삶인가를.
그 60대 남자는 폐섬유증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숨 쉬는 일조차 점점 버거워지는 병. 숨은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리듬인데, 그 리듬이 고통이 될 때 삶은 매 순간 고통이 된다. 그는 마지막 여행처럼 말했지만, 그 말은 어쩌면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무겁게 다가온 것은 그가 홀로 떠나려 했다는 것이다. 죽음은 혼자 맞이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마저 혼자 감당해야 했던 시간들. 가족에게 문자로 남긴 '미안하다'는 말은 삶에 대한 미련보다 타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떠올리는 이유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미안해지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경찰이 항공기 이륙을 늦춰가며 그 60대 남자를 설득했던 이유는 한 인간의 결단을 누군가가 가로막은 순간이자, 또 누군가의 삶을 다시 붙잡은 손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설득이 옳았는지, 그가 다시 견뎌야 할 시간들이 의미를 가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생명을 지켜냈다는 말로 안도하지만, 그 이후의 시간을 살아내는 일은 당사자의 몫으로 남는다. 삶이 다시 이어질 수는 있어도 힘겨운 고통까지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흔히 삶의 반대말처럼 여겨지지만, 조금 다르게 보면 죽음은 삶의 질문이 가장 선명해지는 지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게 되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흔히 삶은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말에 익숙하다. 그러나 종종 중요한 질문이 빠져 있다. 무엇을 견디며, 누구의 도움을 받으며, 어떤 존엄을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가. 죽음을 선택하려는 사람 앞에서 필요한 것은 그가 왜 거기까지 가려하지를 함께 바라보는 시선일 것이다.
뉴스가 남긴 여운은 길게 남는다. 아마도 더 자주 이런 선택의 경계에 서게 될 것이다. 암의 고통과 만성질환의 시대, 삶은 길어졌지만 그만큼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얼마나 오래 살게 할 수 있는가 보다 얼마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죽음은 개인의 일이지만, 그 개인이 거기까지 가게 만든 조건은 사회의 책임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홀로 공항으로 향하지 않아도 되도록, 마지막을 선택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이해와 관심이 삶 안에 충분히 놓여 있는지. 그 질문 앞에서 여전히 망설여진다.
어쩌면 죽음이 모두에게 요구하는 것은 선택의 자유보다 먼저, 덜 외로운 삶일지도 모른다. 고통이 있어도 혼자가 아니고, 약해져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삶.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삶이 설득할 수 있는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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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비행기는 멈췄지만,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죽음은 어디까지 개인의 선택인가. 삶은 어디까지 사회의 책임인가. 그 사이에서 오늘도 살아간다. 숨 쉬는 일이 아직은 고통보다 익숙한 쪽에 기울어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