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다가오면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내게 건네준 것이 있다. 오래전 내가 사 드렸던 빨간 지갑과 금목걸이와 금반지였다. 엄마는 빨간 지갑을 유난히도 아꼈다. 아끼느라 몇 번 사용하지 않은 채로 세월만 곱게 머금고, 가죽은 손때 대신 시간의 숨결을 담고 있던 지갑. 그 안에는 오만원권이 두둑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제 지갑이 뭐가 필요하니' 하시며 먼 길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담담한 모습이었다. 지갑과 금반지 금목걸이를 사 준 사람에게 돌려준다며 둘째 딸인 나에게, 지폐가 들어있던 채로 그 지갑과 함께 내게 건네주셨다.
속수무책으로 그리움이 넘실대는 날에는 그 지갑을 코끝에 가져다 대고 한참을 숨을 들이마신다. 가죽에 밴 엄마의 체취가 아직 남아 있을까 싶어서다. 체취가 옅어지고 시간은 지났지만 그러나 시간은 모든 것을 조금씩 다른 결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는 가죽 냄새만 남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냄새 속에는 여전히 엄마 내음이 나는 것 같다. 제법 묵직하게 잡히는 두께는 그 속을 아직도 확인하지 못했다. 엄마가 주시던 그대로 두었고 엄마의 마음이 거기에 있을 것 같아서다. 그 지갑을 보면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묵은 기억이 와락 쏟아져 내린다.
그 지갑 속의 돈은 아마도 특별한 날 자식들이 드렸던 용돈을 고이 접어 넣어 두었을 것이다. 엄마는 새해 설날이 되면 나팔꽃처럼 활짝 웃으며 그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손자 손녀들의 작은 손에 세뱃돈을 두둑이 주셨다. 돈을 건네는 손길에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종갓집 종부로 평생을 살아낸 엄마는 언제나 집안의 중심에서 사람을 품는 역할을 했다. 제사와 명절, 크고 작은 대소사를 치르며 얼굴에는 좀처럼 싫은 기색이 없었다. 당신의 몫을 묵묵히 감당하는 것이 사랑의 방식임을 몸으로 보여 준 어른이었다.
종갓집 종부라는 임무는 수고와 책임이다. 수많은 친척들을 챙기고 대소사를 정리하며,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집안의 질서를 세웠다. 그러나 엄마는 그 무게를 무게로 말하지 않았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감싸 안았다. 누군가의 허물을 덮어 주고, 누군가의 서운함을 먼저 알아차리는 세심함은 오랜 세월 다져진 품성이었다.
종가 사람들에게 깊은 사랑을 주고는 이제는 멀리 떠난 사람. 그러나 실재보다 더 크게 자리한 엄마의 자리는 해가 갈수록 또렷해진다. 살아 있을 때는 당연하게 여기던 말과 손길이, 부재 속에서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가슴이 시리고 그리운 날도 있지만, 그리움마저 감사하게 품고 살 수 있는 것은 엄마의 품이 얼마나 따뜻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설날이 다가오면 나는 습관처럼 그 빨간 지갑을 꺼내어 본다. 지갑을 볼 때마다 시간의 문이 함께 열린다. 그 안에서 엄마는 여전히 환한 얼굴로 아이들을 부르고, 정성스레 접은 지폐를 건네는 것만 같다. 엄마의 지갑은 오래도록 간직하는 싶은 물건이고 그 안에는 시간과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삶이 들어 있고 펼칠 때마다 따스한 온기가 한 장면씩 살아난다.
엄마가 내게 돌려준 빨간 지갑은 사랑을 이어 살라는 당부였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먼 길 떠나며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남겨 둔 또 다른 이름임을. 엄마는 떠나셨지만, 엄마의 사랑은 나를 통해 다시 흐른다. 빨간 지갑은 점점 더 낡아 가겠지만, 그 안에 든 마음은 닳지 않을 것이다.
~~~~~-----==~~--ㅊ
설 명절 즈음이면 나는 엄마의 지갑을 꺼내어 본다. 그 속에는 수많은 시간이 들어있다. 빨간 지갑을 가만히 보며, 엄마의 기억을 다시 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