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봄동이 제맛이다

봄동은 땅바닥에 몸을 낮추고 자란다

by 현월안




봄은 조용히 다가온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이미 와 있다. 겨울의 무게가 서서히 풀리고 기온이 순해지면 공기 속 어딘가에서 봄이 숨을 고르기 시작한다. 눈꺼풀 위에 햇살 부스러기가 가볍게 내려앉고, 아직 찬기온이 남은 골목 사이로 따뜻한 온기가 천천히 번져간다. 아파트 화단의 목련 가지 끝에는 아직 터지지 않은 봉오리들이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고 있다. 마치 긴 겨울을 건너온 생명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듯하다.




땅속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들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조금씩 몸을 풀고, 마디마디 굳었던 생명의 관절이 조심스럽게 펴진다. 겨울 내내 침묵하던 흙 속은 몽글몽글한 기대로 웅성거리고, 작은 새순들은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을 두드리며 봄을 기다린다. 계절은 늘 그렇게 조용한 온기로 다가온다.



요즘 봄 내음 봄동이 한창이다. 이름부터 어딘가 모를 소박함을 지닌 것이 봄동이다. 반듯하고 말쑥한 채소들 사이에서 봄동은 조금 엉성하고 덜 예쁜 모습이다. 마치 겨울 들판에 그대로 엎드려 있다가 막 일어난 것처럼 납작하고 투박하다. 겉잎은 바람에 긁힌 자국이 있고,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다. 잎은 단단하고 색도 그리 고르지 않다. 말끔하게 단장한 시금치나 상추와 비교하면 세련된 채소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봄엔 봄동이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맛이다. 겨울을 온몸으로 견딘 것이 더 깊은 단맛을 낸다는 사실을.



봄동은 땅바닥에 몸을 낮추고 자란다. 차가운 바람이 아무리 불어와도 허리를 세워 맞서지 않는다. 대신 몸을 낮추어 땅에 바짝 붙는다. 칼바람이 지나가면 묵묵히 그것을 받아낸다. 세상은 흔히 강한 것을 높이 세운 것에서 찾지만, 자연은 다른 방식으로 강함을 보여준다. 때로는 버티기 위해 낮아지는 것이 더 큰 힘이 되기도 한다.



봄동의 삶이 바로 그렇다. 동짓달 매서운 바람이 지나갔을 것이고, 들창 밑에서 고드름이 길게 자라던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눈보라가 밭을 덮던 밤도 있었고, 황사와 꽃샘추위가 번갈아 찾아오던 변덕스러운 날들도 지나갔을 것이다. 그 모든 시간들이 한 잎 한 잎에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봄동은 겨울을 통과한 시간의 기록이다.



봄동을 뜯어 살짝 데치면 특유의 향이 올라온다. 된장과 마늘, 파와 참기름을 넣어 조물조물 무치면 아삭한 식감 속에서 달큼한 봄이 번져 나온다. 또 봄동과 갖은 야채를 섞어 생채맛은 또 어떤가. 그 맛은 단순히 채소의 맛이기보다 그 속에는 겨울바람의 기억이 들어 있고, 눈 녹은 흙의 온기가 들어 있다. 어쩌면 한 계절이 통째로 담겨 있는 맛이다.



사람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종종 고통을 쓸모없는 시간으로 생각한다. 어려움이 닥치면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알게 된다. 그 시간이 내 안의 맛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봄동이 겨울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의 단맛을 낼 수 없었듯이, 사람도 시련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나의 깊이를 얻기 어렵다. 철학자들이 말해온 삶의 진실도 결국 이와 닿아 있다. 삶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과하며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겨울은 언제나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자연은 겨울을 낭비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그 시간을 뿌리로 사용한다. 봄동의 뿌리는 겨울 동안 더 깊어졌을 것이다. 눈 속에서도, 얼어붙은 땅에서도 조금씩 자신을 단단히 묶어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봄이 오자마자 가장 먼저 푸른 잎을 내밀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희망이라는 것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희망은 어둠 속에서 오래 준비된 뿌리 같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조금씩 깊어지고 단단해지다가 어느 날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봄은 경이롭다. 봄은 계절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견딤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제 곧 초록의 계절이 온다. 나무마다 연둣빛이 번지고, 땅에는 초록이 고개를 들 것이다. 겨울 동안 조용히 숨을 고르던 생명들이 다시 빛 속으로 걸어 나올 것이다. 그때 초록을 맞이하며 알게 된다. 삶도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어떤 날은 바람이 매섭고, 어떤 날은 눈이 쌓인다. 때로는 마음이 얼어붙은 듯 고요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시간 역시 나를 자라게 하는 계절이다. 봄동이 땅에 몸을 붙이고 겨울을 견디듯, 인간에게도 삶의 바닥에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버티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도 새로운 잎이 돋아난다. 그래서 봄은 견딘 것은 다시 피어난다는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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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봄이 조금 더 따뜻하기를 바란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연둣빛 기운이 번지기를 바란다. 서로의 겨울을 이해하며 함께 살아가는 계절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의 삶에도 봄동 같은 힘이 깃들기를. 바람에 찢기고 구멍이 나도 다시 잎을 펼치는 힘, 겨울 속에서도 봄을 먼저 알아보는 향기, 낮은 자리에서 단단히 뿌리내리는 힘. 그 힘으로 또다시 봄을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