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종종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오전 10시쯤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전철을 탔다 그런데 전철 안의 평온을 단박에 깨트리고 노약자석에서 싸움이 났다 양팔에 목발을 짚고 선 40대 중반 남자와 자리에 앉은 60대 후반의 여성. 뭐가 그리 심각하게 꼬였는지 지지 않으려는 서로의 기세가 팽팽하다. 장애인이 앉게끔 옆에 있는 보따리를 치우라는 젊은 목발 남. 그리고 보따리를 못 치우겠다는 노인. 칼날 같은 대치가 멈출 기색이 안 보인다.
주변의 공기는 금세 둘로 갈라진 듯 보였다. 장애를 가진 이의 불편함을 헤아려야 한다는 시선과, 연약한 노인의 사정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시선. 그러나 정작 그 갈라진 생각만 있고 그 누구도 용기를 내지는 않는다.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저 흘깃흘깃 훔쳐볼 뿐 모두 방관자일 뿐이다.
그 장면은 옳고 그름의 문제로만 보면, 세상은 너무 쉽게 둘로 나뉜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정하게 결론지어지지 않는다. 권리와 배려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은 예의일 것이다.
두 자리를 차고앉은 노인의 심리는 뭘까. 목발에 의지한 채 서 있던 남자의 분노는 단지 불편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반복된 외면에서 쌓인 감정의 결과였을까. 흔히 사람들은 그들의 의도를 모른 채, 순간의 장면만으로 판단하게 된다.
누군가 나서서 다른 자리를 선뜻 내어 주었다면 어땠을까. "여기 앉으세요."라고. 그때 상황은 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은 그 간단한 것을 쉽게 꺼내지 못한다. 타인의 일에 개입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서, 또 괜한 오해를 살까 두려워서,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더 조용한 방관자가 되어 가는지도 모른다.
삶은 가끔 선택을 요구한다. 크게 보이는 정의와 작게 보이는 친절 사이에서, 흔히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 망설인다. 하지만 어쩌면 답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가 더 옳은가를 따지기 전에, 누가 더 힘든가를 먼저 살피는 것. 그것이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까 싶다.
그사이 전철은 여러 역을 지나갔고, 다툼은 흐지부지 끝났다. 목발을 짚은 남자는 실랑이를 하다가 전철에서 내렸고, 노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다들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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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어쩌면 자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위해 한 발 물러나는 자리, 그렇게 된다면 그 작은 공간에서 사람다운 온기가 피어날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세상은 그리 시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서로에게 남길 수 있는 인간적인 흔적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