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누군가의 마지막을 통해서 또 이어지는
며칠 전, 글을 쓰는 지인의 모친상을 알리는 문자를 받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 사이로 조용히 흐르는 애도의 공기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런데 부의금 접수대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부의금을 받지 않습니다."라는 안내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움과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미안함이 뒤따랐다. 삼 년 전, 엄마를 떠나보내며 수많은 이들의 손길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부의금은 슬픔을 나누고, 남겨진 이들을 향한 조용한 위로였다. 그래서 내 마음을 건넬 통로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상을 마친 뒤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그 결정은 가족들의 뜻이고, 무엇보다 교육계에 계셨던 고인의 오랜 뜻이었다고. 그 말에 잠시 부끄러워졌다. 부의(賻儀)라는 말의 의미를 떠올려 본다. 상가에 보내는 돈이나 물품, 혹은 그러한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웃의 상에 쌀을 나누고, 장작을 보태고, 손을 걷어붙여 함께 궂은일을 돕던 시절. 슬픔은 공동의 것이었고, 애도는 몸과 마음으로 나누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을 대신하는 간편한 방식으로 남았을 뿐이다.
요즘은 많은 것을 단순화하며 살아간다. 관계도 감정도, 또 심지어 슬픔조차 효율로 따진다. 부의금은 요즘 시대의 편리한 의미가 되었고, 때로는 의무처럼 오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날의 장례식장의 안내문은 내게 많은 걸 묻는 듯했다.
한 때 소설가 박완서 작가가 타계한 뒤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라고 했다는 유언이 알려져 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문득 박완서 작가의 유언을 떠올렸다. 자신이 떠난 뒤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당부. 그것은 배려를 넘어서 애도의 본질을 다시 묻는 것이다. 누군가를 보내는 일 앞에서 정말로 나누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일지도 모른다. 혹은 함께 머물러 주는 침묵일지도, 끝까지 배웅하는 발걸음일지도 모른다.
장례식장을 나서는 길에는 봄 볕이 유난히 맑았다. 생과 사가 한날에 포개지는 봄이라는 계절은 언제나 그렇듯 잔인할 만큼 아름답다. 이제 애도는 더 이상 형식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들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슬림해진 장례 문화는 어쩌면 본질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덜어낸 자리에는 더 깊은 마음이 깃들 수 있으니.
때로는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 누구의 상실도 타인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 곁에 머물 수는 있다. 말없이 손을 잡아주거나, 따뜻한 한 끼를 함께 나누며, 그날의 공기를 조금 덜 차갑게 만들어 줄 수는 있다.
그녀의 애도 기간이 모두 끝나면 그녀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려 한다. '함께 밥 한 끼 할까요.' 그 말은 어쩌면 가장 소박한 부의일 것이다.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그러나 오래 남는 위로. 그렇게 또 서로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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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누군가의 마지막을 통해 다시 이어지는 것이다. 떠난 이가 남긴 자리에는 또 서로를 향한 새로운 방식의 마음이 채워진다. 부의금을 건네지 못한 그날, 애도는 함께 마음이 닿는 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