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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의 차분함

유순해지는 감정들

by 현월안



비가 내린다.

여름의 더위가 멈칫하듯 고개를 숙인다.

숨 막히는 더위를 달래주듯이 구름은 천천히 무게를 풀어내고, 빗방울이 소리 없이 세상 위에 내려앉는다. 뜨겁게 달궈진 공기는 물결처럼 식어가고, 도시의 소음마저 비의 리듬에 순화된다. 그 속에서 공기는 차츰 부드러워진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평소와는 다른 시간이 흐른다.
시계의 초침이 아닌, 빗방울의 간격으로 세어지는 시간이다.
분주했던 마음의 발걸음이 멈추고,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소리 없이 기억이 난다. 나뭇잎은 빗물에 몸을 씻으며 반짝이고, 먼지가 내려앉은 도시는 깨끗하게 씻겨진다. 비가 오는 날에는 미루어둔 책을 읽기에 좋은 시간이다.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책에 마음 두기에는 아주 그만인 시간이다.



비가 오는 날은 마음 안쪽의 깊은 생각을 연다.
그 안에는 내가 미뤄둔 생각들, 지나온 계절에서 흘려보낸 표정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질문들이 있다.
'무엇을 향해 달려왔을까' '왜 그랬을까'

질문은 맑은 날엔 잘 꺼내지지 않는다. 햇빛 속에서는 늘 해야 할 일이 먼저 보이고, 그 빛이 내 그림자를 너무 짧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은 그림자는 길어지고,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내 마음의 안쪽까지 닿게 된다.



비기 오는 날은 잠 시 멈춰도 되는 시간처럼 허락을 주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언제나 앞을 향해 달리라고 재촉하지만, 비가 오는 날엔 발걸음을 잠시 멈추라고 속삭인다.
뒤를 돌아볼 수 있고, 나와 마주 할 수 있다.

차분하고 고요한 시간은 마음속에 스며드는 느린 흐름, 생각을 가라앉히는 온화한 무게다. 무겁지 않은 방식으로 부드럽게 가슴속에 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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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고, 잠시 멈춰도 괜찮다는 안도감이 스며든다. 비는 그렇게, 속도를 조율해 주는 여유가 있다. 그런데 비가 머무는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 짧은 머무름 속에서 오래 묵힐 수 있는 마음의 온기를 얻는 것이다.

나는 비 오는 날이 괜찮다.
비가 오는 날의 차분함은, 세상 어느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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