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주는 여유
올여름은 유난히 길고 뜨거웠다. 해마다 더위의 기록은 새로 썼고, 메마른 장마 속에서 시원한 비조차 만나기 어려웠다. 여름은 정말 힘들다. 그 뜨거움 속에서 쓰러지고 싶을 만큼 지치지만, 여름은 멈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저 끝없이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계절이다.
계절은 변한다. 삶이란 내 달리기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숨이 차오르면 멈춰야 하고, 쓰러지지 않으려면 잠시 걸어야 한다. 그렇게 계절은 지혜를 건넨다. 여름의 뜨거운 숨결이 물러난 자리, 예쁜 가을의 시작이다.
가을은 멈춤의 계절이다. 멈춤은 내면을 돌아보고 다시 힘을 모으는 시간이다. 창문을 열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람이 살며시 들어와 내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그 바람은 나에게 속삭인다. '이제 잠시 쉬어도 돼' 여름에는 결코 들을 수 없던 위로가 가을의 바람결에 담겨 있다.
가을이 주는 멈춤의 고요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본다. 무심히 스쳐 지나가던 길가의 작은 들꽃,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저녁놀에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평화로운 기억들. 숨 가쁘게 달리며 놓쳤던 순간들이 이제야 내 눈에 들어온다. 삶도 그렇다. 여름 동안 밀어둔 운동, 미뤄둔 글쓰기, 읽지 못한 책, 마음속 깊이 묻어둔 다짐들. 가을은 그것을 다시 꺼내어 바라보게 하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을 되찾게 한다.
잠시 쉼 멈춤 속에서만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마음의 고요는 힘이다. 숨 고르기가 있어야 달리기를 이어갈 수 있듯이, 삶에도 고요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을은 그 지혜를 깨워 준다.
가을은 고요의 계절이다.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른 만큼 나의 마음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가을 일몰은 가슴속 오래된 그늘을 비춘다. 그리고 고요히 내 위에 내려앉아 세상을 감싸며, 지친 하루의 마음을 위로한다. 가을볕은 삶의 굽이진 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잠시 멈추어도 괜찮다고, 다시 걸어도 늦지 않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가을의 빛깔은 참 아름답다. 황금빛 들녘은 성숙의 은유이다. 갈색 낙엽은 시간의 무늬이고 선선한 바람은 쉼의 향기다. 가을에는 묘한 고급스러움이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깊고, 소박하면서도 우아하다. 치명적인 멋, 가을만이 품을 수 있는 세련됨이 있다. 그 속에서 어느새 가을 예찬하고 가을을 노래하고 가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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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주는 취향은 순수하다. 가을은 나에게 삶의 속도를 가르치고, 멈춤의 지혜를 선물한다. 뜨겁게 달리던 계절이 지나간 자리에 고요와 여유를 놓아주고, 다시 힘을 준다. 그래서 가을을 사랑한다. 그 고요 속에서 회복하고,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 새로움을 얻는다. 가을이 건네는 여유는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