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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한가운데에서

가을이 깊어간다

by 현월안




올여름은 참으로 길었다. 햇볕은 유리창을 녹일 듯 쏟아지고, 도시의 공기는 뜨거운 숨결로 일렁였다. 비가 그리 내리지 않던 여름은 마치 세상이 숨을 멈춘 듯 고요했다. 사람이 만들어 낸 문명의 열기가 사방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세상은 너무 많은 것을 얻는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렇기에 가을이 문턱을 넘을 때마다 느끼는 이 서늘함은 계절의 변화이지만 그것은 사람에게 주는 성찰의 계절이다. 뜨겁게 타오른 여름에서, 자연이 잠시 쉬어가라고, 삶의 속도를 줄이라고, 마음의 소음을 가라앉히라고 속삭인다.



아침마다 나팔꽃은 하늘빛으로 나팔을 불며 새로운 하루를 알린다. 감나무 잎사귀는 푸르름을 잃어가고 그 속의 붉은 열매를 세상에 내보인다. 바람은 살짝 옷깃을 건드리고, 귀뚜라미는 그 바람 틈에 노래를 얹는다. 또 모든 생명은 변화를 준비하며 순리를 배운다.
그 속에서 삶의 비밀을 본다. 더 이상 이겨내는 삶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삶을 배워야 한다고. 자연은 끊임없이 돌고 또 돈다. 그 안에서 억지로 버티기보다, 함께 흐르는 것이 지혜라고 알려준다.



가을엔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너무 앞서 가지 않아도 된다. 턱을 괴고 앉아 여유 있게 느릿하게 햇살을 만끽해도 좋고, 바람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따라 마음의 보폭을 늦춰도 좋다. 한 잔의 커피, 한 권의 책, 한 줄의 문장 속에서 자신을 다시 만나는 계절이고 그것이 가을이 주는 여유다.



책을 읽다 잠시 멈춰 창밖을 본다. 가을 하늘이 파랗다. 그 푸른 하늘이 나를 위로한다. 괜찮다고. 세상은 여전히 돌고, 나무는 잎을 떨어뜨리며 다시 살아갈 준비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문득 따뜻한 음식이 그리워진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란 고구마 한 입, 그 달큼한 맛은 마치 삶이 전해주는 작은 위로 같다.



그렇게 가을은 또 곁을 스쳐 지나간다. 단풍이 물들고, 바람이 깊어지고, 어느새 아침 공기는 겨울의 기척을 품는다. 절기의 변화는 어김없다. 아무리 세상이 이상해지고 기후가 변한다 해도, 태양은 여전히 떠오르고 지구는 묵묵히 자전한다. 그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다. 그러나 그 작음이 아름답다. 거대한 우주 속에서 미미하게 존재하는 나, 그럼에도 웃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삶이란 감사함을 배우는 시간이 아닐까.
하늘과 바람, 해와 달, 나무와 꽃.. 그 모든 것이 내 숨결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 비로소 겸허해진다. 그리고 그 겸허함 속에서 진정한 평온이 피어난다.



계절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세월이 쉼 없이 달린다.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고, 일주는 더 빠르게 지나가고, 그러고 보면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렇게 십 년이 어느새 쌩하고 날아간다. 그 세월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했고, 얼마나 많은 감사를 잊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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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게서 배운다. 조금 느리게, 그러나 깊게 살아가라고. 소유보다 존재로, 욕망보다 평온으로, 소음보다 침묵으로. 그리고 가을은 짧지만, 그 안에 인생의 모든 과정이 들어 있는 듯하다.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천천히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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