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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의 편견을 들여다본다

이 세상은 원래 다채로운 빛깔이다

by 현월안




지금은 다양성이라는 찬란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 모두의 항해는 여전히 거친 풍랑 속이고, 자기만의 좁은 돛대에 갇혀 있다. 하나의 틀로 세상을 맞추려 하고, 때로는 하나의 색깔이 진실이라고 하는 시선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어느 하나 기준과 어긋나면 틀렸다고 하고, 그 울타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반대의 의견을 던진다. 나와 우리라는 지극히 좁은 잣대를 가지고, 그 경계 밖의 것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때로는 미리 정한 색안경을 끼고, 세상의 무한한 스펙트럼을 하나의 색으로만 치부해 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많던가.



이러한 고정된 시선을 향해서, 연암 박지원은 일찍이 깊은 당부를 남겼다. 세상을 단 하나의 색깔로 가두지 말라던 그의 가르침은, 지극히 평범한 대상인 까마귀를 통해 섬세하게 꼭 찍어서 얘기했다. 까마귀를 검은색이라는 선입견을 두고, 흔히 불길함의 상징으로 치부하고 그 존재 자체를 멀리했다. 멀리서 바라본 까마귀는 그 이름처럼 오롯이 검게 보인다. 그러나 연암은 그 거리를 좁혀서 가까이에서 그리고 마음을 열고 자세히 관찰할 것을 권한다.



종종 까마귀의 깃털이 까맣다고만 단정한다. 실제로는 검붉은 기운을 띠는 개체가 다수이고, 햇빛 아래서는 푸른빛이 감돌기도 한다. 날아오르는 순간, 찬란한 햇살을 받은 까마귀의 날개는 잠시 자주색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영롱한 비취색으로도 변하는 경이로운 순간을 보여준다. 이처럼 까마귀는 빛과 바라보는 이의 각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 연암은 넉넉한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다"라고, 사물은 본래 정해진 색이 없는데, 단지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이 성급하게 그 색을 미리 결정해 버리는 것이라고. 또 대상을 직접 보려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마음에 '까맣다'라고 판정해 버리는 오만함이 시대를 초월하는 서글픔이 배어 있다.



보지 않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은 선입견을 낳고, 선입견은 편견으로 굳어져 틀 속에 가두게 된다. 색안경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미리 부정적인 색깔을 덧씌운다. 연암은 이러한 세태를 향해 뼈아픈 울음을 토해냈다. "슬프다! 까마귀를 검은색에 가둔 것도 모자라, 다시 그 까마귀를 잣대로 삼아 세상의 모든 색을 가두는구나..." 이러한 탄식은 닫힌 사유에 일침을 하는 철학적 울림이다.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한, 모두는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는 세상을 볼 수 없다. 세상은 오직 내가 쓰고 있는 그 색안경의 색깔로만 존재하게 될 뿐입니다. 색안경이 빚어낸 장벽은 상대방을 향한 혐오의 막말과 난폭한 행동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하게 만든다. 타인을 향한 이해와 공감은 색안경의 어두운 필터를 통과하게 된다.



그러나 색안경을 벗는 순간, 세상은 새로운 빛깔로 되살아난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그저 배척해야 할 적일 뿐이지만, 그 렌즈를 벗고 들여다보면, 비로소 알게 된다. 서로 연결된 존재이며, 내가 너고 네가 나라는, 인간 본래의 근본을 알게 된다.



살짝 무시했던 검은 까마귀가 푸른빛으로 반짝이고 붉은색으로 타오르는 희망의 날개를 보게 될 것이다. 맑은 날의 바다가 짙은 남색이라면, 흐린 날의 바다는 연한 녹색이고. 바다는 스스로 단 하나의 색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나의 색안경이 그 무한한 바다를 하나의 고정된 푸른색으로 가두었을 뿐이다. 까마귀가 수많은 색으로 빛나고, 나의 선입견이 그 아름다운 변주를 하나의 흑색으로 고정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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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한 틀을 과감히 벗으면, 다른 세상과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작은 차이는 다름이 아닌 존중이 될 것이다. 다채로운 색으로 물든 바다의 깊이와, 찬란한 빛으로 빛나는 까마귀 날개의 신비로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을 본래 다채로운 빛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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