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그 주변도 모두 시간이 지나간다
옷장 문을 여는 순간, 나의 시간을 머물고 있는 옷들이 걸려있다. 그 시간을 정리를 해야 하는데 난감하다. 지금 정리하기도 그렇고 또 그대로 두고 입는다는 것도 살짝 어색한 느낌의 옷들이 걸려있다. 세월과 기억의 시간이 뒤섞여,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펼친 듯하다. 손끝에 닿는 옷감의 감촉은 아직 부드럽지만, 마음 한편은 묘하게 쓸쓸하다.
한때는 내 삶을 반짝이게 했던 옷들이 줄줄이 걸려 있다. 그 옷들은 나의 시간과 감정이 스며든 기억의 조각이다. 설렘으로 고른 옷,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한참을 거울 앞에 서서 입어보던 옷, 인생의 중요한 날에 나를 감싸주던 옷들. 그때의 나는 그 옷 안에서 조금 더 자신감 있었고, 조금 더 젊었고,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고 믿었다.
이제 그 옷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다르다. 그때의 색감은 어느새 변했고, 완벽하다고 믿었던 실루엣은 빛을 잃었다. 거울 앞에서 다시 입어보면, 옷보다도 내 시간이 더 바래 있음을 안다. 이제 더 이상 지금의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옷이 변했고 나도 변했다.
유행은 돌고 돈다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단순히 되감기지 않는다. 세월은 다시 어울리는 색을 바꾸고, 마음의 온도를 달리한다. 예전에는 예쁜 색이 좋았다면, 이제는 차분한 색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예전에는 짙은 향기 속에 나를 담았다면, 지금은 향이 거의 없는 파스텔의 온화한 평온함이 좋다. 그렇게 사람은 조금씩 변한다. 마치 옷이 몸에 닿으며 길들여지듯, 세월도 사람을 천천히 길들인다.
옷장 속에는 유효기간이 지난 설렘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한때는 나를 아름답게 만들었던 옷들이지만, 이제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옷걸이에 걸린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옷들은, 어쩌면 나의 한 시절이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표현이다. 정리를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끝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추억의 실밥이 옷감 사이에 엉켜 있어, 잡아당기면 기억까지 풀려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은 옷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정리하는 일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그 옷을 버리면, 그 옷을 입던 나도 함께 사라질까 봐. 그 시절의 웃음, 그때의 공기, 그 옷깃에 스며 있던 떨림마저 잊힐까 봐.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대로 두게 된다. 언젠가 다시 입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 옷이 내 안의 한 시절을 대신 기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옷장 앞에 서서 오래된 옷을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 속에, 그 시절의 내가 잠시 깨어난다. 좀 더 젊을 때 그 옷을 입고 세상에 나가서 경쟁을 했다.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정말로 어떤 순간이 오면 나는 그 옷들을 차근히 정리할 것이다. 그것은 나의 시간을 정리하는 의미일 것이다. 마치 오래된 편지를 다 읽고 봉투를 덮는 일처럼,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작별. 모든 것은 때가 오면 놓아야 한다는 것을, 삶이 가르쳐주었으니까.
그날이 오면 그때의 나를 지켜줘서 고마웠다고 인사하고 나면, 옷장 안에는 조금의 여백이 생길 것이다. 그 여백은 낯선 공기로 채워질 테고, 새로운 계절의 빛이 스며들 것이다. 새로운 옷, 새로운 색, 새로운 시간이 또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삶은 그렇게 끊임없이 정리되고, 또 채워지는 옷장과도 같다. 바래가는 것은 슬프지만, 그 자리를 비워야 또 다른 빛이 들어온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오래된 옷 앞에서도 마음이 한결 따뜻해진다. 그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나의 시간과 삶이 남긴 기록이기 때문이다.
~~~~~---~-----~~---+
옷장 문을 조용히 연다. 지난 시간들이 부드럽게 속삭인다. 미소를 짓는 것 만 같다. 그리고 문을 닫는다.
그 안에는 여전히 나의 시간이, 나의 향기가 그리고 나의 여운이 걸려 있다. 옷장 안에는 여전히 나의 시간이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