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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가는 철학

나이는 내 안의 시간이고 향기다

by 현월안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나이를 말할 때 한숨을 섞는다.
"벌써 환갑이야." "이제 지천명이네." 그 말 끝엔 쓸쓸한 웃음이 달려 있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과 예전만 못한 말의 힘을 떠올리며 나이를 말한다. 마치 세월 탓이기도 하듯 말이다. 그런데 그 한마디 속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과 그리고 또 여전히 살아 있음을 말하려는 작은 고백이 숨어 있다.



나이는 세상과 부딪히며 쌓아온 흔적이고 눈물과 웃음으로 새긴 나의 이력이다. 그런데 가끔 나이를 내 세운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세상의 질서를 정하려 하고, 순서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내 보인다. 예전에는 나이가 존중의 질서였다. 먼저 걸어본 이의 발자국을 따르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겸손의 윤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고전에 보면 상치(尙齒)라는 말이 나온다. 이를 귀히 여긴다는 뜻이다. 그 옛날엔 치아가 세월의 거울이었다. 인공 치아가 없던 시대, 이의 개수로 나이를 헤아리고, 치아의 마모로 삶의 굴곡을 읽었다. 그래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의 순망치한(脣亡齒寒) 시간이 지닌 은유였다.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과 세대가 세대를 받드는 상생의 철학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나이 든 이를 공경하는 마음은 도덕이고 삶이 만들어낸 지혜였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첨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나이는 더 이상 권위가 되지 못한다. 나이를 말하는 순간, 누군가는 낡은 존재로, 또 누군가는 뒤처진 사람으로 여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를 감춘다. 더 젊어지려 하고, 또 동안이라는 말에 안도한다. 젊음이 능력의 다른 이름이 된 세상에서 나이 듦은 마치 퇴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공자는 "부모의 나이를 알아야 하고. 그것은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 두렵다."라고 했다.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쇠함을 마주해야 하는 일이다.
나이를 잊고 사는 것은 죽음을 외면하는 일이고 나이 듦을 인정한다는 건 유한함을 아는 용기다.



흔들리지 않는 나이를 불혹이고 세상과 자신 사이의 균형을 잡는 시기다. 하지만 요즘 시대의 마흔은 여전히 흔들린다. 책임은 무겁고, 불안이 가까이 있다. 부모와 자식과 일과 꿈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출렁인다. 그래서 지금의 불혹은 혹을 안고 살아가는 또 다른 이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공자의 말이 새삼 뼈아프다. "나이 사십이 되어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산다면, 그 인생은 이미 끝난 것이다."라고 했던 말은 꾸짖음이고, 성숙하라는 다정한 당부일지 모른다. 불혹은 변명이 통하지 않는 시기, 젊음의 미숙함 뒤에 숨을 수 없는 나이, 그 얼굴에 책임을 지고 자신의 시간을 설계해야 하는 나이다. 그런데 요즘 불혹은 어쩜 다시 배우는 시작의 문턱인지도 모른다.



나이 듦은 세련된 노련함이다. 젊음이 불꽃이라면, 나이 듦은 그 불을 꺼뜨리지 않고 지켜내는 온도다. 젊음이 도전이고, 나이 듦은 해야 할 것의 의미를 안다. 삶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소유보다 내려놓음을 배운다. 가지는 법보다 놓는 법을 아는 순간, 자유로워진다.



우리 사회의 평균 나이가 마흔여섯이라는 매체 보도를 보았다. 지금 사회가 불혹의 한가운데 서 있다. 이제는 스스로의 성숙으로 세상을 살아야 할 때다. 나이를 내세우는 것보다 나이를 품는 것이 젊음이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숫자 위로, 주름의 여유로 흰머리의 지혜로. 삶이 내게 부여한 또 하나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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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어를 유려하게 말할 줄 알고 세월의 맛을 아는 사람이 찐 젊은 사람이다. 나이의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익어간다. 그래서 나이를 세어본다. 그건 세월을 잃지 않기 위해서고, 내 안의 시간에게 예의를 다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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