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성찰의 시간을 품는다
사계절 중 아름다운 달은 시월이다. 사계의 윤곽이 뚜렷하고, 시월은 그중에서도 조화롭고 완성된 달이다. 더위와 추위의 경계가 고요히 숨을 고르고, 햇살과 바람이 경계를 허물고 조화를 이루는 시기다. 시월의 공기에는 거친 기운이 없다. 낮에는 따뜻한 온기로 감싸고, 밤에는 선선한 바람이 어루만진다. 가을은 사람이 살아가기 좋은 온기를 선물한다.
가을 아침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대기는 투명한 수정처럼 맑다. 대지 위로 안개가 내려앉고, 햇살이 그 위를 천천히 걷어올릴 때 세상은 마치 거대한 커튼을 열듯 새롭게 드러난다. 그 속에서 자연이 만들어내는 순수한 연출을 본다. 매일 같은 풍경 같지만, 그 속엔 하루하루 다른 미세한 결이 있다. 바람의 방향과 구름의 밀도 하나까지도 다르다. 그래서 가을은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가을엔 신발에 닿는 이슬마저 다정하다. 그 차가움이 몸에 닿는 순간 더 깊이 깨어난다. 이런 감각은 가을, 오직 시월에만 허락된 느낌이다.
햇살을 정면으로 받은 빨간 사과 한 알은, 계절의 진심을 품은 결정체다. 감나무에서는 초록빛이 사라지고, 대신 은은한 황금빛이 번진다. 가을은 스스로의 성숙을 드러낸다. 서두르지 않고, 꾸밈없이, 그러나 누구보다 단단하고 청명하게 보여준다.
은행나무 아래로는 노란 열매가 떨어져 그 특유의 향을 퍼뜨린다. 누군가에게는 불쾌할 수도 있지만, 생의 한 주기가 끝날 때 나는 냄새, 그것은 부패의 향이 아니라 다음 생을 위한 자연의 연결이다.
무엇보다 가을의 절정인 단풍은 스스로를 가장 찬란한 빛으로 물들인다. 붉음, 주황, 노랑, 갈색이 한데 어우러져 파노라마처럼 이어질 때, 문득 겸손을 떠올린다. 아름답게 타오르고 소리 없이 색을 바꾸고, 다 타오른 뒤엔 조용히 떨어진다. 화려함의 끝에서 비로소 고요함으로 돌아가는 그 모습에서 가을의 철학을 배운다.
겨울의 침묵으로 가기 전, 가을은 성찰의 시간을 준다. 모든 것이 충분히 익었고, 이제는 내려놓을 때임을 안다. 그래서 가을의 색은 슬프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다. 그 따뜻함 속에는 감사가 있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푼 수많은 것들. 곡식과 열매, 그늘과 바람, 그 모든 것에 대한 고마움이 들어 있다.
시월엔 풍요와 성숙의 끝에서 겨울을 준비한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들판이 비워지는 것은 비움의 미학이다. 채워야만 풍요로운 것이 아닌, 비워야 다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이제 시월이 지나간다. 황금빛 들판도, 붉게 물든 산도, 따뜻한 햇살도 서서히 뒷걸음친다. 하지만 서운하지 않다. 왜냐하면 가을은 떠나면서도 사람에게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마음 한 편의 여유와, 손끝의 따스함,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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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간다. 그 감각은 더 또렷해진다. 가을은 또 기억으로 남아, 삶의 길 위에서 불현듯 다시 되살아날 것이다. 오래 전의 들녘 냄새처럼, 문득 스치는 바람처럼. 그래서 가을이 저무는 것은 마음속에서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