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한가운데서 만나는 사랑
가을은 유난히 그리움을 불러오는 계절이다. 바람에 낙엽이 흩날릴 때마다, 그 잎 하나하나가 지난날의 기억처럼 가슴에 내려앉는다. 코로나의 긴 어둠이 세상을 덮었던 그때, 엄마와 아버지를 3년 사이를 두고 하늘로 보내드렸다. 서로 다른 해였지만, 세월은 이별을 한 줄의 연민으로 엮어 놓았다. 해마다 가을이 찾아오면, 그리움은 다시 피어오른다. 하늘나라는 평안하실까. 생전에 좋아하시던 단팥빵을 손에 들고 웃으시던 모습이 문득 그리워진다. 혹시 그곳에서도 두 분은 손에 빵을 들고 서로를 챙기며 웃고 계시진 않을까.
지난 긴 연휴, 우리 형제자매는 마음이 한데 모여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고향 가까이에 자리한 추모공원으로 향했다. 깊은 산속, 가을빛이 고운 곳이었다. 바람은 부드럽게 불고, 단풍은 붉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부모님의 안식처 앞에는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환히 웃고 계신 사진이 걸려 있다. 그 미소는 여전히 따뜻했고, 살아생전처럼 우리를 맞이하는 듯했다.
"아버지, 엄마 저희 왔어요", "잘 계시나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사를 건네자, 모두의 목소리가 나뭇잎 사이로 흩어졌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리움이란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묵직한 감정이 가슴 안을 맴돌았다. 언니의 눈가에 맺힌 눈물, 두 남동생의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나의 떨리는 손끝. 그 모든 것이 부모님을 향한 사랑의 다른 형태였다.
엄마는 종갓집의 종부로, 평생을 부엌과 손님맞이를 하며 살아오셨다. 늘 바쁘셨지만, 단 한 번도 얼굴에 피곤함을 내비치지 않으셨다. 손님이 찾아오면 새벽같이 일어나 음식을 준비하시고, 아무리 힘들어도 정성스레 상을 차리셨다. 사람들은 엄마의 손맛을 기억했고, 그 손끝에 스며 있던 마음의 온도를 더 또렷이 기억한다. 엄마의 부엌은 사랑을 익히는 공간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다 품어내던 엄마의 마음은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귀했다.
아버지는 늘 묵묵히 종가를 잘 다독이고 지탱하시던 분이었다. 말수가 적었지만, 그 침묵 안에는 깊은 사색이 있었다. 종가의 크고 작은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시면서도, 하루 일과가 끝나면 일기를 쓰셨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창고 구석에서 박스 몇 개를 발견했다. 뚜껑을 열자, 빽빽하게 쌓인 일기장들이 나왔다. 중학교 때부터 거르지 않고 써 내려간 기록들이었다. 그 속에는 삶을 살면서 가족을 위해, 묵묵히 살아낸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글이란 참 신기하다. 사람이 떠나도 그 사람의 마음을 남긴다. 언어는 그렇게 삶의 흔적이 되어, 시간의 강을 건너간다. 아버지는 하루의 기록이고 일기를 쓰신 것이지만, 그 일기 속에서는 이미 삶의 작가였다.
추모공원의 언덕에는 가을빛이 깊게 물들었다. 붉게 물든 단풍잎 사이로 햇살이 내려앉고, 그 빛이 부모님의 사진을 감싸 안았다. 이상하게도 슬픔보다는 따뜻함이 더 컸다. 두 분이 아름다운 곳에 계신다는 사실이 마음을 놓이게 했다. 마치 하늘이 두 분에게 가장 평화로운 안식을 허락한 듯했다.
우리 형제들은 잠시 묵념을 한 뒤, 조용히 둘러앉았다. 그곳에는 슬픔보다는 평화가, 그리움보다는 감사가 흐르고 있었다. 부모님이 남기신 건 따뜻한 사람의 향기였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 함께 밥을 나누던 따스한 온기, 그리고 삶을 성실히 살아내시던 모습. 그것이 두 분이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이었다.
추모공원을 나서며 형제자매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마음속에 있던 무언가가 조금은 녹아내린 듯했다. 부모님과의 추억을 얘기하며 추모공원 주변을 걸었다. 떨어지는 낙엽이 바람에 흩날렸고, 그 소리는 마치 부모님이 "잘 다녀가거라" 하며 인사하시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가을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인생은 그리움을 배우는 여정이 아닐까. 떠남은 슬프지만, 그리움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삶을 살아가며 수없이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그러나 사랑으로 이어진 연결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엄마의 따뜻한 손, 아버지의 조용한 미소, 그리고 그분들이 남긴 향기로운 삶의 철학이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쉰다. 부모님은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그분들의 사랑은 내 삶의 바탕이 되어 여전히 나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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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가을이 익어간다. 부모님을 떠올리며 감사의 기도를 한다. 두 분이 그곳에서도 서로를 챙기며 웃고 계시기를, 그리고 우리를 향해 고운 단풍빛 미소로 바라보시기를. 가을 한가운데에서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다시 느낀다. 그리움은 사랑이 머무는 또 다른 의미임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