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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품격은 다르다

가장 맑은 순간에 담담할 수 있는 순수

by 현월안




가을 하늘은 높고, 대지는 점점 멀어진다. 공기가 맑아질수록 세상의 결이 선명해지고, 나무의 속은 조금씩 비워 간다. 가득 채워야만 살아 있다고 믿었던 마음이 어느새 가벼워진다. 감추어져 있던 풀숲이 드러나듯, 삶도 비움의 순간마다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바람은 잎을 떨어뜨리며 가르친다. 무겁게 쥔 것일수록 먼저 떠난다고.



가을의 들판에는 그리움이 낮게 깔리고, 빛은 한층 더 부드러워진다. 나뭇잎이 한 장씩 떨어질 때마다, 지난 계절의 나를 하나씩 놓아 보낸다.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가을 위로 찬 기운이 번지면, 세상은 더 단단해진다. 새벽 공기 속엔 이미 한 조각의 냉기가 깃들어 있다. 계절은 그렇게 예고 없이 바뀐다. 그 변화는 다가올 새로움이고 또 다른 시작이다.



가을은 계절의 다리를 건너는 중이다. 여름의 잔열, 그리고 저만치 다가온 찬 그림자가 한데 뒤섞인다. 그 사이에서 세상은 잠시 숨을 고른다. 그래서 가을은 복잡하고 다양함을 지녔다. 따뜻함과 쓸쓸함이 한날에 찾아오고, 풍요로움과 허무함이 한 마음 안에 공존한다. 나이테처럼 쌓여온 시간의 무늬가 유난히 도드라지는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을 생각의 계절이다.



가을은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고 비움의 미학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자라지 않아도 좋고, 더 높이 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지금의 자리를 단단히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품격이다. 나무가 잎을 떨구듯, 인간도 때가 되면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 그제야 진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에도 사계절이 있다면, 가을은 그중 가장 성숙한 계절이다. 무르익음 속에 이별을 품고, 끝을 알면서도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을의 꽃은 유난히 빛난다. 봄처럼 서두르지 않고, 여름처럼 뜨겁지 않다.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피어난다. 마지막 빛을 다해 세상을 밝히는 그 모습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품격 있는 완숙의 경지다. 서리가 내릴수록 꽃잎의 색이 더 짙어지는 것은, 어쩌면 마지막이야말로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려주는 철학이고 은유다.



지금의 이 가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시간은 언제나 앞을 향해 흐르고, 그 속에서 삶이 순환한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에도 시간의 결이 묻어난다. 가을은 그 결을 따라 흐르고 지금, 무엇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되묻는다.



겨울은 모든 흔적을 덮고 그 아래엔 보이지 않는 생명이 자란다. 얼어붙은 땅속에서도 봄은 묵묵히 준비한다. 가을은 그 예비의 시간이다. 결실의 계절이자, 침묵의 계절이고, 기다림의 계절이다.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음을 가장 고요하게 일러주는 계절이기도 하다.



삶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쌓고, 이루고, 채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면 비로소 깨닫는다. 진정한 풍요는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욕심을 비우고 나면 마음의 하늘이 높아진다. 그제야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고, 너그러워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가을이 주는 위대한 철학이다.



가을이 있기에 겨울의 추위는 온기가 되고, 겨울의 침묵 속에서도 봄의 숨결은 자란다. 이 순환의 지혜를 알고, 매 순간을 지금 이 계절의 기적으로 받아들인다. 가을은 끝까지 아름답고, 시들더라도 품위를 잃지 않고, 그리고 모든 것과 이별하면서도 새로운 봄의 씨앗을 품는 여유까지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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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품격은 다르다. 가장 맑은 순간에 담담할 수 있는 순수와, 가장 쓸쓸한 시간에 따뜻할 수 있는 온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숙이다. 가을은 봄을 품은 침묵이며, 겨울을 건너는 지혜의 시간이다. 떨어지는 잎사귀 하나에도 서늘한 바람 한 줄기에도 따뜻한 은유와 철학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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