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둔 사랑에 대하여
앙상한 가지 끝에서 바람을 견디는 홍시 몇 알이, 늦은 가을 하늘에 외롭게 매달려 있다. 한 계절을 통째로 살아낸 그 열매들은 이미 많은 것을 내어주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금빛이 스며 있던 잎사귀는 먼저 낙엽이 되어 떠났고, 풍성했던 가지는 이제 속살을 드러낸 채 추위를 받아들인다. 감나무는 조용히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삶은 조금 남겨두는 것이라고.
도심 한복판에서, 제법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오래된 마음 하나를 꺼내 보인다. 허공을 둥글게 돌던 동박새 한 마리가 내려와 마지막 남은 홍시를 쪽쪽 쪼아 먹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어느새 발걸음이 멈춘다. 누군가에게 남겨 둔 사랑이, 다른 생의 겨울을 건너게 하는 순간이다. 시인 김남주는 오래전에 말했다.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까치밥은 가난했던 시절에도, 누구보다 배고픈 사람조차 마지막 한 조각을 남겨두던 마음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보리를 끓여 죽을 만든 시절에도 나눔이 있었고 내 몫만 챙기지 않았다. 그것은 삶을 향한 예의이고 나눔의 격이고, 자연 앞에서 사람이 드러낸 가장 아름다운 인정이었다. 탈무드에서 보면 혼자서는 아무도 살 수 없다고 했다. 선조들은 이미 그 지혜를 알고 있었다.
겨울이 가까워질수록 세상은 더 다급하고 마음은 더 차가워지기 쉽다. 하지만 나무 끝 홍시 하나가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완전히 메마르지 않았다는 은유다. 작은 붉은 점 하나가, 가을 끝자락 하늘 끝에서 희미하게 빛을 켠다. 남겨 둔 것이고 그리고 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답고도 고운 삶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자연의 작은 변화에 반응하고 또 뭔가에 이끌리면 나도 모르게 감성을 깊이 투영시키게 된다. 가을이면 들판을 따라 하늘은 높고, 바람은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를 머물고 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내 곁을 지나며 말을 걸어오던 계절이 가을이다. 그때 보았던 감나무는 누군가를 위해 작은 위안을 품고 있었다. 그 위안은 까치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언젠가 장면을 다시 떠올릴 나의 마음에게도 준 것이다.
자연은 늘 그렇게 다 가진 것처럼 여유가 있고, 남겨두는 순간에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소유보다 비워둠의 풍요다. 그러기에 생이 겨울을 건너는 것은 따뜻한 마음 안에 있다. 누군가를 위해 조용히 남겨둔 마음이고 내가 먼저 내민 손끝 한 번이 세상을 덜 춥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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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열매를 주고, 새는 그 열매를 먹고 추위를 견딘다. 그러고 나면 봄이 온다. 나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사랑은 얼마나 품었고, 얼마나 나누었는가. 겨울이 다가올수록 그 말이 더 또렷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