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국화의 계절이다
요즘 가을꽃이 찬란하다. 여름의 숨결을 거두고, 땅속의 시간이 열매로 익어가는 계절이다. 햇살은 깊고, 바람은 서늘하고, 하늘은 높고 푸르러진다. 그 한가운데에서 들판의 끝자락마다 국화가 피어난다. 들길을 걸으면 한 줄기 향이 코끝을 스친다. 화려하지 않지만 분명하고, 은은하게 빛을 바란다.
국화는 가을의 꽃이다. 국화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불린다. 서리를 맞아도 시들지 않는 기품, 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의연함. 그것은 삶의 의지다. 세상의 화려함이 저물고 낙엽이 쓸려가도, 국화는 그 한가운데에서 오히려 가장 또렷이 빛난다. 마치 모든 사라짐 이후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참의 모습 같다.
국화는 오래전부터 가을의 상징이다. 봄의 매화가 청렴하게 빛나고 여름에는 연꽃이 빛나고, 겨울에는 대나무가 강직함을 상징한다면, 가을의 국화는 고요한 절개를 의미한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은 단풍보다 국화를 더 사랑했다고 한다. 단풍이 불처럼 타올라 사라지는 아름다움이라면, 국화는 침묵 속에서 오래 견디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소란보다 고요하고 화려함보다 단정하다.
산과 들에는 이름 모를 국화들이 피어난다. 구절초, 산국, 감국, 쑥부쟁이, 개미취... 이름만 들어도 어딘가 정겨움이 묻어난다. 그중에서도 구절초는 가장 사랑받는 들꽃이다. 연분홍으로 피었다가 서서히 흰빛으로 바래는 그 변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인간의 삶을 보는 듯하다. 청춘의 불빛이 서서히 빛을 낮추며, 마침내 순백의 평온으로 가라앉는 모습이다.
산국은 이름처럼 산에서 자란다. 짙은 노란 꽃잎 사이로 짧은 털이 돋아 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속에 생의 기운이 가득하다. 감국은 그와 달리 꽃잎 끝에 단맛이 돌아서 감국이라 부른다. 쓴맛과 단맛의 차이는 어쩌면 삶의 맛과도 같다. 어떤 이는 산국처럼 세상의 바람을 쓴맛으로 기억하고, 또 어떤 이는 감국처럼 그 속에서도 단맛을 찾아낸다. 국화의 세상에도 인생의 맛이 스며 있다.
쑥부쟁이는 이름부터 정겹다. '쑥을 캐러 다니는 불쟁이의 딸'이라는 전설이 꽃의 이름에 깃들어 있다. 연보랏빛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옛날 그 소녀의 웃음소리라도 들려오는 듯하다. 단양과 충주에 자생하는 단양쑥부쟁이는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지역 이름을 가진 국화다. 땅의 이름을 품은 꽃, 지역의 바람과 햇살이 깃든 존재. 꽃은 뿌리를 숨기지만, 그 뿌리가 닿은 곳의 기억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벌개미취. 이름이 조금 거칠지만, 국화 중에서 가장 먼저 피어난다. 연보랏빛 꽃잎이 햇살 아래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새벽의 별 같다. '벌판에서 잘 자란다'는 뜻처럼, 햇살과 바람이 스며드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피어난다. 그것은 생의 본능이자 자유의 선언이다. 누가 돌보지 않아도, 누가 주목하지 않아도 스스로 제 빛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들국화다.
들국화라는 이름에는 역설이 숨어 있다. 들국화는 사실 특정한 종이 아니다. 가을 들판에 피는 국화류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이름 없는 이름, 그것이 들국화다. 그러나 그 무명성 속에서 오히려 자유가 있다. 하나로 고정되지 않기에 모든 이름을 품을 수 있고, 어딘가에 속하지 않기에 어디서든 피어날 수 있다. 들국화는 자유로운 존재의 은유다. 세상의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서서, 자신만의 향기로 세상을 채운다.
들국화는 사람의 마음을 닮았다. 누군가의 발길이 닿지 않는 길가, 바람에 쓸리고 비에 젖는 곳에서도 꿋꿋이 피어난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피어난다. 국화의 향은 멀리 퍼지지 않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그윽하게 마음을 적신다. 사람도 그러하다. 진정한 향기는 멀리서 소란스럽게 퍼지는 것이 아니라, 곁에 닿았을 때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다.
가을 햇살이 낮게 기울었다. 들녘에 붉게 물든 오후. 바람은 차가워지고, 국화 향기는 더 짙어진다. 꽃잎에 햇빛에 반짝이고, 그 반짝임 속에 계절의 철학이 숨어 있다. 모든 것은 시들지만, 시듦은 끝이 아니다. 또 다음 봄을 위한 쉼, 다시 피어날 생을 위한 준비다. 국화의 짧은 생애는 그래서 고요하면서도 단단하다. 사라짐 속의 영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길가에 들국화가 지천에 피어 있다.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치지만, 그 작은 꽃송이들은 제각기 고요한 빛을 내뿜는다. 그것이 누군가의 시선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생을 충실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존재 그 자체로 충만한 순간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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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국화의 계절이다. 조용히 절개를 지키는 꽃처럼, 찬바람 속에서도 들국화가 지천에 피어 있는 계절이다. 꽃은 지지만 향기는 남고, 해는 지지만 하늘은 더 맑아진다. 그것이 국화가 인간에게 남겨주는 가을의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