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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노벨문학상 '저항의 멜랑콜리'를 읽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by 현월안




살을 에는 한겨울, 가로등은 켜지지 않고, 바람에 거대한 나무가 뿌리째 뽑힌다. 시간이 멈춰 있던 교회 시계가 느릿하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던 그때, 한 유랑 서커스단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를 싣고 마을로 들어온다.



그 거대한 몸체는 바다의 괴물 리바이어던을 닮았고, 그저 광장 한가운데 조용히 세워져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 침묵의 존재 앞에서 스스로의 공포를 발산하기 시작한다. 누구도 고래를 본 적이 없는데, 모두가 그 존재를 이야기한다. 누구도 위협받지 않았는데, 모두가 위태로워한다.



그 광경은 어쩌면 사회의 축소판이다. 어떤 실체 없는 불안이, 그리고 그 불안이 만들어내는 군중의 광기가 한 시대를 지배해 온 역사의 반복을 닮았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저항의 멜랑콜리'는 그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사탄탱고'에서 체제에 짓눌린 인간의 무력함을 그렸던 작가는 이번엔 고래라는 묵시록적 상징을 통해 문명과 인간의 내면이 맞부딪히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의 문장은 숨 쉴 틈도 없이 흘러간다. 마치 멈출 수 없는 시간처럼, 한 문장이 다음 문장을 밀어내며 용암처럼 천천히 번져간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부서져 있다. 세상과 단절된 음악학교 학장 에스테르 죄르지, 욕망으로 가득 찬 그의 아내, 그리고 우주를 말하며 방황하는 청년 벌루시커. 이 세 인물은 각각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세상의 광기에, 인간의 나약함에, 그리고 스스로의 절망에. 그리고 그들의 저항은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넣는다.



그럼에도 절망적이지 않다. 그 어둠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덧없고 동시에 위대한가를 본다. 라슬로는 구원이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 그것은 고통의 한가운데서 조차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시선에서 찾아낸다. 삶이란 어쩌면 끝없이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리듬으로 균형을 찾아가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벌루시커가 별과 달, 태양을 이야기하며 밤하늘을 헤맨다. 그의 눈에 세상은 광기로 가득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우주를 본다. 그 우주는 질서가 아니라 혼돈이고, 혼돈 속에서만 인간은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온전한 인간이다. 그는 세상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세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제목에 담긴 두 단어, 저항과 멜랑콜리(우울)는 인간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인간은 삶을 향해 끊임없이 저항하지만, 그 저항은 언제나 우울감을 동반한다. 세상을 바꾸려는 힘은 늘 슬픔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변화는 상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무언가를 잃어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저항은 고통스럽고, 그 고통 속에서만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한다.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둠과 침묵, 그리고 정지된 시간 속에서 라슬로가 말하고자 한 ‘멜랑콜리의 미학’은 인간이 얼마나 고요하게, 그러면서도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 소설을 덮고 나면 묘한 여운이 남는다.
그것은 절망이기보다, 삶의 본질에 대한 냉철한 깨달음이다. 세상은 언제나 광기로 기울어져 있고,
그 속에서도 누군가는 여전히 음악을 듣고, 별을 올려다본다. 그 작은 시선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라슬로는 그 시선을 '저항'이라 했고,
그리고 그 저항의 깊은 바닥에 가라앉은 슬픔을 '멜랑콜리(우울)'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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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멜랑콜리'는 이렇게 묻는다.
세상이 무너질 때, 당신은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빛은 어둠 속에서만 보인다. 그러니 절망의 한가운데서라도 당신만의 빛을 향해 나아가라. 그것이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저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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