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새로운 숨결이 된다면 그것은 귀한 일이다
내 신분증에는 작은 크기의 스티커가 하나 붙어 있다. 빨간 씨앗 위로 두 갈래의 초록 새싹이 피어난 모습, 희망의 씨앗이라 불리는 그것은 내가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는 표시이다. 이 스티커는 반짝이지도, 누군가의 눈에 잘 띄지도 않지만, 내게는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 언젠가 내가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마지막 인사이고, 한 생이 다른 생에게로 건너가는 귀한 연결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장기기증의 범위를 넓히겠다고 하는 방송 보도를 보았다. 뇌사뿐 아니라, 연명의료를 중단한 후 심정지로 숨을 거둔 사람도 장기를 기증할 수 있게 하자는 법 개정이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다. 지난해 장기기증을 등록하고 올 초 연명의료 중단까지 서약했던 나로서는 그 소식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한 사람의 선택이 제도의 벽 앞에서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그리고 그 벽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사실 오래전부터 뇌사 상태가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죽음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의학적 조건은 제한되어 있다. 살아 있을 때 수없이 좋은 일 하고 떠나야지라고 다짐하더라도, 제도의 속에서는 그 마음이 쉽게 닿지 못한다. 그런데 이제, 그 좁은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 누군가의 생명이 다한 자리에서 또 다른 생명이 시작되는 가능성이 넓어진 것이다. 아마도 생명을 대하는 시선이 한층 성숙해지고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지금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사람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반면, 기증자는 줄어드는 추세라고. 장기를 기증받고 싶어 하는 기다림은 매 순간이 생사의 경계에 놓인 절박한 기다림이다. 그런 현실 앞에서 장기기증의 확대는 생명을 향한 윤리를 묻는 문제다.
부작용과 윤리적 논란을 피할 수는 없다. 인간의 몸을 나누는 일, 생명과 죽음을 다루는 일은 언제나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제도가 완벽해지기를 기다리기보다, 누군가의 선의가 조금씩 변화시킨다면, 생명을 나누겠다는 기증자의 마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러나 죽음의 방식은 각자 다르다. 누군가는 조용히 사라지고, 누군가는 어떤 흔적을 남긴다. 내 몸이 더 이상 나를 지탱하지 못할 때, 그 일부가 누군가의 삶을 다시 일으킨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한 생이 다하고, 또 다른 생이 이어지는 연결은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삶을 열심히 살았다면, 죽을 때도 그 의미를 남겨야 하지 않을까. 젊은 날에는 삶의 무게를 일로 증명하려 애썼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음의 결단은 단순해진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했던 사람, 세상에 작은 선의를 남기는 일,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지갑 속 스티커를 볼 때마다 묘한 안심을 느낀다. 그 안에는 내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약속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끔 지인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장기기증의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다. 괜히 분위기가 무거워질까 싶어 처음엔 슬쩍 말을 꺼낸다. "나, 장기기증 서약했어" 그러면서 조용히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꺼내 보인다. 작은 씨앗 모양의 스티커를 볼 때, 사람들은 잠시 말을 잃는다. 그러다 이내 "대단하다", "나도 해볼까"라는 말이 하나둘 나온다. 이런 선택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어쩌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권유일지도 모른다.
흔히 의미 있는 삶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진짜 의미는 죽음의 순간에 드러난다. 끝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철학이 된다. 삶은 유한하기에 아름답고, 그 유한함을 타인에게 건네줄 때 의미가 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종교의 언어일 수 있지만, 죽음 이후의 사랑은 인간의 언어다. 장기기증은 그 사랑의 실천이다.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겠지만, 그날이 왔을 때 내 몸이 누군가의 새로운 숨결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심장이 다시 뛰고, 내 각막이 세상의 빛을 다시 본다면, 여전히 살아 있는 셈이다. 인간이 서로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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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용기다. 그리고 희망을 심는 마음이다. 지갑 속 작은 스티커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초록빛 새싹이 반짝인다. 언젠가 내 생명이 다하더라도, 그 새싹은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다시 자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