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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볕아래 삶을 내다 넌다

가을볕이 참 곱다

by 현월안




가을볕이 참 곱다. 햇살이 반짝이며 살포시 내려앉는다. 문득 가을볕을 누가 퍼 가기라도 할까 봐 볕이 예쁘게 드는 곳에 빨래를 펼쳐 다. 그냥 보기에도 아까운 너무 예쁜 가을의 볕이다.



가을볕은 손끝에 닿을 듯 가까운데, 잡으려 하면 슬며시 빠져나간다. 햇볕을 조금이라도 오래 붙잡아 두려는 마음으로, 두꺼운 양말짝을 들고 예쁘게 내리쬐는 곳을 찾는다. 햇살에 마음까지 데워지길 바라는 듯, 손끝이 바쁘다. 가을바람이 살짝 스치고 삶의 냄새가 묻은 옷이 한낮의 볕 속에서 반짝인다.



나는 빨래를 개는 걸 좋아하고, 빨래 너는 걸 즐긴다. 햇볕의 결을 읽어가며,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옷들을 가지런히 펴서 넌다. 언젠가 독서 토론 모임을 하면서 누군가 물었다. 무엇을 할 때 행복하냐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한 마디씩 저마다의 행복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그때 빨래를 널 때가 행복하다고 말 한 기억이 있다. 생각해 보면 평화로운 일상이 행복이다.



행복은 구수한 된장국 한 그릇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일상 한편에 살포시 스며 있다. 그건 특별한 날의 의미가 아니고, 빨랫줄 위에서 마르며 반짝이는 햇살의 조각 같은 것, 소소하지만 작지 않은 온기다.



가족의 양말목을 만지고, 젖은 셔츠의 솔기를 다듬으며 나는 묻지 못한 안부를 마음속에서 조심스레 꺼내본다. 큰아이의 옷소매 끝에 묻은 가을 냄새, 운동복에 배어 있는 땀 냄새, 그리고 남편의 와이셔츠에 남은 삶의 자국. 그 모든 것들이 우리 가족의 시간이고, 사랑의 흔적이다.



가장 깊은 볕자리에 큰아이의 옷을 널고, 그 옆에 무릎이 살짝 나와버린 바지와 닳아버린 양말을 넌다. 그 흔적들은 어쩌면 세월의 주름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헐거움과 닳음 속에서, 삶이 얼마나 단단하게 견디고 있었는지를 안다. 젖은 솔기 속에 묻어 있는 하루의 무늬들이, 빨랫줄을 환하게 밝힌다. 눈부실 만큼.



가을볕 아래서 하고 싶은 일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햇살을 조금 더 담고 싶어 담요 하나 더 널고,
바람이 살랑 불러오는 그 향기를 따라 커피를 한 잔을 내려서 마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가 기울고, 바람이 서늘해진다.



오늘은 가을 배춧국을 끓일 참이다. 멸치육수를 냈더니 냄비 속에서 가을맛이 고요히 번진다. 국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즈음, 집 안에 구수한 냄새가 퍼진다. 창문을 활짝 열어도 그 냄새는 찰랑찰랑 발밑에 감돈다. 그 음식의 향기는 함께 살아가는 시간의 향기다. 진한 가을의 냄새가 공간을 감싸고, 하루의 피로가 서서히 풀려간다.



가을은 볕 하나로 종일 이야기를 해도 모지란다. 햇살의 언어는 따뜻하고 느리다. 그 빛을 따라가다 보면, 인생의 속도도 어느새 고요해진다. 빠름보다 깊음이 더 중요하다는 걸, 이 계절 가을은 조용히 가르쳐준다. 때로는, 세상이 너무 분주해 행복을 미루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가을볕은 지금 이 순간, 충분히 따스하지 않으냐고 묻는 듯하다. 행복은 내일의 계획이 아니라, 오늘의 볕 속에 숨어 있는 듯하다.



저녁이 저물고, 창가에 앉아 피아노곡 소나타를 작게 틀어 놓는다. 음표 하나하나가 햇살처럼 마음에 내려앉는다. 책을 읽다가, 또 남은 원고를 쓴다. 단어 하나마다 오늘의 온도를 새긴다. 이 가을, 나는 느릿한 행복 속에서 충분히 젖어간다. 가을볕은 나에게 삶의 철학을 가르쳐준다. 모든 것은 사라지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덧없기에 더 귀하다. 햇살은 잠시 머물다 가지만, 그 빛이 스며든 자리는 오래도록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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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그 가을볕이 스며든 마음의 자리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는다. 가을볕 아래에 삶을 예쁘게 널어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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