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서 울컥 익숙한 기억이 밀려온다
며칠 전 용산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우연히 삼각지역 출구 근처에서 멈춰 섰다. 익숙한 빛깔의 추억이 공기 속을 흐르는 듯했다. 지하철역 안, 어둑한 기둥 곁에 배호 가수의 동상이 있었다. 그의 대표곡 '돌아가는 삼각지'가 푯말 위에 적혀 있었다.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어딘가에서 울컥 울림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잊고 있던 시간이 조용히 돌아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르던 그 순간들. 아버지가 즐겨 듣던 바로 그 노래였다. 우리 형제들은 그때 너무 어렸고, 아버지는 너무 조용히 배호 노래로 삶을 달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셨다. 그러나 배호의 목소리만 나오면 음정은 상관없이 살짝 따라 흥얼거리셨다. 소심하게 작은 목소리 속에 들어 있었던 아버지의 마음.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버지에게 음악은 유일한 쉼, 다 닳아 늘어진 테이프가 유일한 취미였다. 아버지 세대는 취미라는 단어가 사치이던 시절을 살았다. 하루를 바삐 살아내는 일이 가장이 짊어진 의무였고, 삶의 무게는 등 뒤에서 묵묵히 흘렀다.
배호 가수는 그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낸 스물아홉, 너무 짧은 생으로 마감을 했다. 암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녹음을 끝냈다고 하는 그 노래. 그의 목소리는 삶의 처절한 깊이를 가진 음악이었다. 시대의 음지에서 피어난 청춘의 울음이었고, 병의 고통과 싸우며 가난한 시대를 살아낸 청년 배호의 노래엔 삶의 애환이 들어있다.
삼각지역의 동상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사람들은 바삐 지나가고, 지하철의 문은 반복해서 열리고 닫혔다. 그런데 그때의 아버지의 시간이 보였다. 아버지가 무겁게 삶을 살아내시고 또 종갓집 종손의 삶은 책임이 이었다. 그 모습이 떠올랐다. 삶의 무게가 어깨에 쌓일 때마다, 일기를 쓰고 나지막이 배호를 들으며 마음을 추슬렸을 것이다.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은, 우리 형제들 가슴에 닿았고, 우리의 삶 어디엔가 침착히 스며서 살아남았다. 이제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그 시절 서 있던 길목을 나 또한 걷고 있다. 삶은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다. 그러나 배호의 노래를 들으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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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기 빛처럼 익숙한 음악 한 곡이 들려온다. 그곳 어딘가에 아버지의 시간이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 같다. 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그 시절 아버지의 음 악이, 그리고 사랑은 오래된 노래처럼, 세월을 지나도 닳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