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부의 철학은 우정이나 협업의 철학을 넘어선다
한때 영화 '친구'가 스크린을 뜨겁게 달궜다. '친구 아이가'라는 짧은 대사는 사투리라기보다, 그것은 피 끓는 청춘의 언어이고, 세상에 맞서 함께 버티던 이들의 신호였다. 그 말 한마디엔 의리와 신뢰가 들어 있고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인간적인 정이 묻어 있다. 시간이 흘러도 그 말은 오래 남는다. 그 속에는 갈망하는 관계의 연결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 영화가 나온 20년 뒤,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또 하나의 한국어가 세계인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속 오일남의 한마디, "우리는 깐부잖아" 어린 시절 구슬치기 놀이에서 쓰이던 말은, 이제 세상을 넘어선 상징이 되었다. "깐부끼리는 네 거, 내 거가 없는 거야" 그 단순한 말은 오래된 지혜를 품고 있었다. 나누고 믿고 함께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서로에게 기대어야 하는가를 일깨워 준 것이다.
깐부라는 말이 다시금 회자된 것은 첨단 세상의 중심에서였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삼성의 이재용, 현대의 정의선 세 명의 거인이 한 테이블에 앉아 치킨과 맥주를 나누었다. 세상은 그 만남을 '깐부치킨 회동'이라 불렀다. 언뜻 소박하고 장면 같지만, 그 속에는 시대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이제 산업도 기술도, 인간의 미래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자각 말이다.
AI, 반도체, 전기차 이런 거대한 산업의 키워드들은 모두 연결과 협력의 언어로 다시 쓰이고 있다. 경쟁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 기술의 속도가 인간의 이해를 앞질러버린 세상에서 진심 필요한 것은 깐부의 마음일 것이다. 서로의 손을 내밀고 함께 미래를 모색하는 동맹의 결의 말이다.
치킨집의 둥근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의 모습은 어쩌면 새로운 시대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만든 기술이 다시 인간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일 말이다. 어쩌면 세상은 너무 오래 경쟁했고, 너무 쉽게 단절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세상이 하나의 장으로, 모두가 한 마당의 이웃으로 엮여가고 있다. 국경은 지도 위에만 남고 삶의 흐름은 이미 서로 스며들고 있다.
깐부의 철학은 우정이나 협업의 언어를 넘어선다. 나와 네가 나뉘지 않는 세상이고, 이제 세상을 잇는 철학이 되었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설계하고, 로봇이 노동을 대신하더라도 기술의 혁명보다 중요한 건 서로 연결된 신뢰의 협업이다.
지금 사는 이 시대는 거대한 무대다. 기술과 문화와 산업과 인간이 한 마당에서 어우러지는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예전엔 바다와 산이 나라를 갈랐다면, 이제는 데이터가 국경을 넘어 흐르고, 사람의 마음이 디지털을 타고 닿는다.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깐부 마을이 되어가고 있다. 그 속에서 한국은 함께 사는 법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의 나라다. 한강의 기적이 공장의 불빛에서 시작됐다면, 이제는 관계의 따뜻함에서 새로운 기적이 자라날 차례다.
세 사람의 치킨 회동이 던진 울림은 작지 않다. 세상이 냉혹한 무역전쟁의 한복판을 지나며 서로의 목소리를 높이는 지금, 다시금 깐부 정신이 아닐까 싶다. 내 편과 네 편이 아닌, 함께 살아남는 길을 찾는 것. 그 길 위에서만 기술도 산업도, 삶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깐부끼리는 네 거, 내 거가 없는 거야" 그 말은 인간이 세상을 함께 꾸려나가기 위한 오래된 지혜다. '친구'에서의 말처럼, 세상은 모두 한 무대고 모두 친구다. 한 마당에서 숨 쉬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동반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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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이미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 국경을 넘어 손을 맞잡는 시대이고, AI 깐부 동맹의 시작은 산업의 협력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서 인간의 온기와 함께 살아가는 기쁨이 피어날 테고, 기술의 미래가 더 따뜻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