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슬픔 앞에서 작아진다
며칠 전, 오랜 지인의 모친상에 다녀왔다. 늘 그렇듯 검은 옷을 입고 조심스레 빈소로 향했다. 향 냄새가 은은히 감도는 입구에서 조의금 봉투를 내밀자, 상주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조의금은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순간 손끝이 멈췄다. 그 말 한마디에 장례식장의 공기가 잠시 멈춘 듯했다. 조의금 사절, 기업인이나 정치인 또 유명인에게나 종종 보던 문구였다. 그러나 평범한 한 가정이 그렇게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 참으로 낯선 일이다. 조문을 마치고 상주와 마주 앉고는 지인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뜻이에요.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건 우리 식구들 몫이라서요"
그 말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죽음을 가족의 몫으로 감당하겠다는 것은 오롯이 자신 가족이 감내하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책임의 다른 이름이고, 격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싶다.
세상은 무엇이든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져 있다. 상을 당하면 조의금을 내고, 잔치를 하면 축의금을 내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따뜻한 전통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의례라는 이름 아래 서로에게 부담이 되기도 한다. 나도 냈으니 받는 게 당연하다는 계산이 깔린 관계 속에서 진심이 흐려지는 일도 많다. 돈이 마음을 대신하게 되면서, 마음의 무게를 돈의 액수로 환산하는 데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날 본 지인의 가족은 그 굳어진 관행에 조용히 균열을 냈다. 그들은 자기 식구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조의금 대신, 고인을 향한 정성과 시간을 바치며 가족이 함께 장례를 치르는 그들의 모습은 낯설었지만 아름다웠다. 부자도, 유명인도 아닌 평범한 가족이 보여준 그 결단은 한 줄의 철학처럼 내 마음속에 새겨졌다.
함께 간 지인들이 농담처럼 물었다. "혹시 공직에 출마하세요" 지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가족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 웃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특이한 결정이라 말했지만, 가족이 신념을 지키는 인간다운 선택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한쪽 가슴이 잔잔하게 따뜻했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나는 언제부턴가 남들이 하는 대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결혼하면 축의금을 내고, 장례가 나면 조의금을 내는 일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 당연함 속에는 진심보다 의무가 더 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상은 마음의 빚을 지고 사는 것이 익숙해진 건 아닐까. 서로에게 진 빚이 많을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걸 알면서도,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계속 같은 길을 걷는다.
그날 그 가족은 그 길 위에 작은 빛 하나를 켜 놓았다. 돈이 아닌 마음으로 애도를 표현하는 마음이고, 그 길은 아주 오래전 선조들이 살았던 세상의 방식이기도 하다. 슬픔은 원래 그저 곁에서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전부다. 그 단순한 진리를 잊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들은 조용히 일깨움을 주었다.
문상 후 집으로 돌아와 봉투 속에 넣었던 조의금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도 작은 의미라도 망자에게 노잣돈이라도 보태야 하는 생각과, 사람의 도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전하는 데 있고, 그 마음이 꼭 돈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히려 진심은 말 한마디와 눈빛 하나, 손을 잡아주는 온기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래서 뒤에 꼭 그녀에게 진심을 담아 따뜻한 식사로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슬픔 앞에서 작아진다. 그 작아진 마음을 품격으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인의 가족은 그 품격을 보여주었다. 남들이 다 하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자신만의 길을 열었다. 그것은 거창한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지연스러운 결의 문제다.
그날 이후 문득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삶의 예법을 스스로 정하고 있는가.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때로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그 길이 외롭더라도, 그것이 진심의 길이라면 언젠가는 그 빛을 따라 걸어갈 것이다. 지인의 가족은 그 결정을 통해 나에게 묻는 듯했다.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남의 슬픔을 위로하나요" 그 화두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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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도리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 사랑은 거창한 것보다 그저 누군가의 슬픔 앞에 조용히 고개 숙이고, 아픔을 함께 느껴주는 일. 그것이 인간의 격이며, 삶의 예절이다. 그날 문상에서 본 그 가족의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그 가족의 손끝에 담긴 마음은 깊고 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