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다마지오' 뇌과학 철학
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단순하지만 끝내 닿을 수 없는 물음 앞에서 종종 오래 서성인다. 철학은 오랫동안 그 답을 사유의 언어로 탐색해 왔고, 과학은 그 이후를 실험의 언어로 이어갔다. 그리고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자아가 마음에 오다'는 생명의 언어로 그 해답을 제시한다. 다마지오에게 의식은 생명이 자신을 느끼고 유지하며 반응하는 근원적인 작용이다. 인간의 의식을 생명 그 자체의 연속선 위에 올려놓고,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한 최초의 순간을 추적한다.
설명은 놀라울 만큼 구체적이다. 뇌간과 시상, 대뇌 피질이 만들어 내는 미세한 전기적 리듬 속에서 생명은 자신을 감지하고, 감정이 생리적 반응을 넘어 자각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통해 의식은 태어난다. 다마지오는 이를 생명의 자기 감각이라 부른다. 세포가 스스로의 균형을 지키려는 내적 충동, 항상성에서 출발해, 그 균형을 인식하고 조절하는 마음의 진화를 설명한다. 의식은 생명을 보호하려는 본능에서 비롯된, 가장 오래된 반사신호인 셈이다. 인간에게 생명의 언어는 한층 더 섬세하게 변주된다. 균형을 지키려는 충동은 공감과 책임, 윤리와 사랑으로 확장된다.
인간의 자아를 세 겹의 층위로 나눈다. 가장 밑바탕에는 생리적 항상성을 유지하는 원자아가 있다. 그 위에 외부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경험은 나의 것이다라는 자각이 피어나는 자아가 놓인다. 그리고 기억과 언어, 사회적 관계가 얽혀 하나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자서전적 자아가 그 정점에 자리한다. 이 세 층위가 서로를 비추며 순환할 때, 생명은 단순한 반응체계를 넘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로 진화한다. 의식은 생명이 자신을 이야기로 엮으려는 시도이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을 다시 쓰는 존재로 변모한다.
의식은 한 개인의 뇌 속에서만 머무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을 문명 전체가 공유하는 또 하나의 생명 작용으로 본다. 생리적 항상성이 개체의 생존을 위한 내부 조절이라면, 사회문화적 항상성은 인류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 낸 외부 조절 체계다. 법과 윤리와 예술과 철학, 종교와 과학은 모두 그 확장된 항상성의 산물이다. 문명은 거대한 신경망처럼 서로의 감정을 조율하며 존재의 균형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생명체인 셈이다.
의식적으로 성찰할 줄 아는 이는 고통받는 이를 어루만지고, 도움을 준 이들에게는 보답하며, 해를 끼친 이들에게는 제재를 가하는 행동 방식으로 발전한다. 생명의 조절 원리가 사회의 윤리로 확장되고, 신경의 리듬이 공동체의 정서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존을 넘어, 서로의 생명을 돌보는 존재로 나아간다.
'자아가 마음에 오다'는 인간의 마음을 다시 가르치는 철학서다. 마음은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라 느끼고 감각하는 윤리이라고 단언한다. 사고의 중심에 감정을, 감정의 중심에 생명을, 생명의 중심에 관계를 놓는다. 앎이란 머리로 쌓는 정보라기보다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공명하는 일이다.
요즘 학교는 지식과 정보로 가득 차 있지만, 정작 살아 있는 배움의 온기를 잃었다. 배움이란 뇌의 기능이라기보다 감정이 이끄는 윤리의 확장 행위라고 말한다. 아이가 세상을 배우는 것은 '나'를 인식하는 또 하나의 과정이다. 지식은 머리에서 머리로 전해지지만, 이해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건너간다. 진정한 교육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닌, 마음이 몸을 거쳐 삶으로 체화되는 과정이다.
의식은 생명이 자신을 향해 고요히 눈을 뜨는 순간이다. 그 눈이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서로를 본다. 그때 생명은 자기 안의 고통을 넘어, 타인의 심장과 박동을 맞춘다. 의식은 그렇게 생명을 하나로 묶는 연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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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뇌의 불빛이고 생명의 숨결이며, 앎은 논리가 아니라 사랑의 확장이다.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공명하기에 인간이다.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이 바뀌면, 인간을 가르치는 방식도 달라진다. 그리고 언젠가, 그 새로운 이해가 모두의 마음속에서 다시 하나의 생명을 깨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