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찾아온 뜻밖의 온기
집에서 가까운 백화점은 우리 부부에게 작은 쉼의 공간이다. 가끔 시간이 나면 종종 그곳을 찾아 점심을 먹고, 천천히 차를 마시고, 필요한 물건을 구매한다. 그곳에는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아주 맛있는 점심메뉴가 있다. 그리고 그저 같이 책을 한 권을 나누어 읽고 그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 좋기 때문이다.
우연히 백화점 가발 매장을 지나다가 남편이 우리 여기 한 번 들어가 볼까 한다. 남편은 제법 진지하고 보는 시선이 달았다. 처음엔 그냥 궁금한 듯 바라보던 눈길이 확신을 가지고 보는 것 같았다. 결국 친절한 가게 주인의 안내에 의해 남편은 자연스럽게 가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즐거운 듯 이것저것 가발을 써 보았다. 가게 주인은 여러 스타일을 건네주었고, 남편은 거울 앞에서 고개를 돌려가며 표정을 바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남편의 얼굴에 환한 빛이 번졌다. 몇 가닥 더 풍성한 머리숱이 그의 표정을 몇 살쯤 젊어 보이게 만들었고, 그 모습은 조금 더 젊은 생기였다. 그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남편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형제들 단톡방에 올렸다. 잠시 후 도착한 메시지들은 예상보다 더 열렬한 호응이었다. 정말 젊어졌다고 바로 구매하리고 난리가 났다. "딱이야. 그냥 사요!"
시댁 형제들은 남편보다도 더 일찍 머리숱이 빠진 형제가 있다. 시아버님은 젊은 나이에 이미 완전 민머리셨으니, 어찌 보면 남편은 그 집안의 유전적 흐름 속에서는 그래도 선방한 편이었다. 하지만 앞머리 쪽이 다소 옅어진 것이 늘 마음 한구석에 걸렸던 모양이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웃던 사람이, 실제로는 아주 작은 변화 하나에도 이렇게 마음이 들뜨는 걸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조금만 더 일찍 챙겨줄 걸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들켜도 좋은 듯한 설렘을 숨기지 못했다. 쇼핑백에 담긴 건 머리카락 몇 올이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 남편의 새로운 자신감이 들어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남편은 어린아이가 새 신발을 신고 집 안을 뛰어다니듯 가발을 썼다 벗었다 반복했다. 그러면서 거울 앞에 서서 옆모습도, 뒷모습도, 표정까지 다양하게 바꿔가며 스스로를 바라보았다.
인간은 사실 사소한 것에 마음이 흔들리고, 참 작은 것에 다시 살아난다. 머리카락 몇 올에 불과한 변화가 한 사람의 표정을 이렇게 환하게 바꾸고, 하루의 온도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다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삶에서 큰 기쁨은 큰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아주 작은 만족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된다. 작은 만족은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표정을 부드럽게 만들고, 사람의 곁을 더 포근하게 만든다.
연말에 부부 모임 일정이 제법 있다. 남편은 그 모임에 부분 가발을 하고 갈 생각이다. 처음엔 조심스럽게만 웃던 남편이, 그 변화를 스스로 즐기고 있다는 것이 보기에도 참 따뜻하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기대도 하고, 조금은 설레하기도 하는 듯하다. 아마 그 모임에서 남편은 평소보다 조금 더 밝게 웃고 있을 것이다.
문득 남편의 자신감을 되찾아 주는 일이 이렇게 쉬운 것이었다니. 나이가 들어서 머리 빠지는 정도로 이해하려 하면서 그 마음에 필요한 작은 위로는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변화 하나가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려놓는 힘이 이렇게나 큰 줄 몰랐다. 남편의 얼굴에 머무는 따뜻한 미소를 보며, 사소한 마음을 발견하고 소중히 여기는 일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남편은 원래도 잘 웃는 사람이다. 화낼 줄도 모르는 사람, 마음이 넉넉한 사람, 누구에게든 온기를 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 웃음이 한 겹 더 깊어졌다. 그 웃음은 아마도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조용히 나이 들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다시 만나는 또 하나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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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서 시작된 작은 가발놀이는 우리 부부의 일상에 뜻밖의 온기를 가져다주었다. 인생은 거창한 성취보다 사소한 기쁨에 삶이 빛난다. 사랑은 이런 순간들을 함께 웃어주는 데서 자란다. 남편의 새 가발이 그의 머리 위를 감싸주듯이, 삶은 작은 만족의 총합이다. 그리고 그 작은 만족이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고 그것이 일상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