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투명하고 쓸쓸한 향기
늦가을의 공기는 유리 조각처럼 맑고, 손끝을 스치는 순간 작은 떨림을 남긴다. 겨울의 문턱까지 다다랐지만, 마음은 여전히 늦가을의 온기를 붙들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도 늦가을의 기척은 은근하게 스며 있다. 마지막 더 강해진 은행 열매의 냄새, 골목에서 피어오르는 군고구마와 붕어빵의 달큼한 향기, 어디선가 들려주는 공기 속에 촘촘히 깃든 만추의 냄새들이다.
늦가을은 쓸쓸하다. 그러나 그 쓸쓸함이 싫지 않다. 오히려 가만히 곁에 두고 싶은 쓸쓸함이다. 한 해의 빛과 숨을 견뎌낸 나무들이 잎을 떨구며 겨울을 받아들이는 순간, 생명의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묵묵함이 풍경 속에 스며든다. 낙엽이 한꺼번에 쌓여 갈색이 거리를 덮으면, 청소 차량과 환경미화원들은 분주해지고, 카페 앞 야외 테이블에는 늦가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커피를 나누는 사람들. 별것 아닌 일상의 장면 같지만, 그 속에는 늦가을이 들려주는 긴 숨의 리듬이 있다.
삶이 무겁고 복잡할 때에도 만추의 공기는 어깨에 내려앉아 잠시 숨 고르기를 허락한다. 가을의 공기에는 신기하게 사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여름에는 더위에 쫓겨 계절을 느낄 여유가 없고, 겨울에는 차가움에 웅크려 내면의 소리를 듣기 어렵다. 그러나 가을은 한 걸음만 늦추면 된다. 그 작은 여유로도 바스러진 잎을 밟는 소리가 울리고, 수평선처럼 얇은 햇살이 손등에 닿아 따스한 금빛을 남긴다. 얼굴을 스치는 공기 속에는 스러짐과 시작, 마감과 또 다른 생이 들어 있다.
해마다 가을이면 나도 모르게 글을 쓰고 가을 예찬을 하게 된다. 단풍의 빛깔을 찬미하고, 공기의 투명함을 노래하고, 하늘의 깊은 푸름을 글로 남긴다. 그러나 아무리 써 내려가도 가을의 깊이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 글보다 먼저 오는 감각이 있고, 말보다 깊이 있는 감동이 있다. 가을은 설명하기보다, 그저 바라보고 들이마시며 겪는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올 가을은 더 말없이 붙잡게 된다.
오늘 아침 얇게 얼음이 얼었다. 그 위로 또 늦가을 햇살이 번졌다. 찬기운은 갑자기 공기의 결을 바꾸고 늦가을과 초겨울의 경계를 또렷하게 그어 놓았다. 그 경계 위에서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순간의 냄새가 있다. 늦가을 투명하고 쓸쓸함의 냄새, 다가오는 겨울은 무채색의 고요한 냄새가 있다. 그 두 향이 한 곳에서 만나는 순간, 삶의 흐름과 자연의 흐름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느낌이 든다.
곧 차가운 겨울 공기가 도시를 감싸고, 사람들은 더 옷깃을 여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찰나만큼은 마음 한구석에 깊이 전해 준다. 늦가을 더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다. 계절은 매번 돌아오지만, 사실은 매번 처음처럼 다르다. 올해의 가을은 올해뿐이고, 지금의 공기는 다시는 동일한 모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삶의 철학은 거창한 명제가 아니라, 어쩌면 계절 앞에서 가만히 느끼는 마음일지 모른다. 사라져 가는 것을 그대로 보아야 하고, 다가오는 것을 맞이하는 마음. 계절은 조용히 순환하고 있다고 일러준다. 사라짐이 있어야 시작이 있고, 끝맺음이 있어야 다음의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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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서리가 내려앉아 겨울이 한 발짝 다가왔다. 옷깃을 조금 높이 세우고, 차갑지만 맑은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신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는 아름다움, 그리고 짧은 순간이 남긴 고요한 철학을 마음에 들인다.
곧 겨울이 온다. 아직 볕은 늦가을의 숨결이 아직 남아 있고 그리고 또 그늘에는 청아하게 맑고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