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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비껴가는 날이 있다

철학서 독서 토론하는 날

by 현월안




철학서 독서 토론이 있는 날이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약속 장소로 향하는 그 시간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오랜 시간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어 온 이들은, 서로의 결을 이미 잘 아는 이들이다. 같은 책을 읽고 서로 다른 시선으로 길어 올린 생각들은 원을 이루고, 그것을 하나의 깊은 우물처럼 들여다보곤 한다. 이른 시간에 만나서 저녁까지 하루를 꼬박 길게 만나는 살인적인 시간을 소화하는 날이다. 토론이 끝나고 난 뒤에는 늦은 점심 또 이른 저녁을 먹고 또 토론을 이어가고 이 모임의 오래되고 타이트 습관이다.



어느 날, 누군가 조심스레 제안을 했다. "다음엔 점심과, 저녁을 각자 도시락으로 준비해서 함께 나눠 먹는 건 어떨까요? 이동하는 시간이 아까워요"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 환하게 호응을 했다. 밥을 나누는 일, 그 속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의 결이 있다. 정성이 담긴 음식 앞에서 모두는 부드러워지고, 말은 온기를 얻게 된다. 그 제안은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이야기처럼 자연스러웠다.



독서 토론이 있는 날 설렘 반, 긴장 반으로 점심과 저녁에 먹을 도시락 두 개를 준비했다. 넉넉한 반찬통에 푸짐하게 갖가지 반찬을 담고, 색색의 과일을 곱게 썰어 넣었다. 뚜껑을 닫고 나니까, 음식보다 더 많은 마음이 함께 담긴 듯했다. 도시락 가방을 손에 들자마자 작은 기쁨이 손끝을 스쳤다. 그렇게 나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전철을 가다리는 동안 플랫폼 의자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르며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이어서 전철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급히 일어나 탑승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도시락을 그대로 의자 위에 두고 전철을 탔다는 걸 알았다. 심장이 턱 내려앉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시 그 역으로 돌아갔다. 발걸음은 빨라지고 마음은 더 급하게 뛰었다. 그런데, 어머나 세상에 내가 앉았던 그 자리 위에 내 도시락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간 가슴이 뜨끈해졌다. '이렇게 반갑고 뭉클할 줄이야.'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오전 철학서 토론을 마치고, 사람들이 하나둘 각자의 도시락을 펼치는 순간 나는 그 이야기를 꺼냈다. 모두들 환하게 웃으며 "정말 다행이다", "요즘은 남의 것을 손대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어요"라며 한 마디씩 보탰다. 도시락을 무사히 되찾아서 그런지 밥 맛이 더 좋았다. 도시락을 잃어버렸다면 두 끼를 얻어먹는 마음도 불편했을 텐데 도시락을 되찾은 것이 감사하고, 그 마음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더 따뜻했다.



세상은 종종 삶의 괘도를 살짝 비켜가는 일이 생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렀다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어떤 섬세한 배려와, 어긋남의 순간에 슬며시 진실을 건네주곤 한다. 가끔 삶이 평평한 곧은 선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사실은 가만히 보면 어긋남과 비틀림의 연속이고 멈춤과 돌아봄으로 이루어진 곡선에 더 가깝다. 잘 가다가도 뜻밖의 사건으로 엇나가고, 애써 준비한 일이 낯선 길로 흘러가 버리기도 한다. 그 어긋남은 때로 새로운 깨달음의 문을 살며시 열어준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지금의 나를 더 깊이 바라보게 된다.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삶은 없다. 그리고 그 어긋난 자리에서 사람은 서로를 어루만지는 법을 배우고, 세상은 또 다른 숨결을 건네준다. 틈이 생겨야 빛이 들어오듯, 삶의 작은 틈새 속에서 서로를 만나고, 또다시 배우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철학서 토론이 있는 날은 도시락 준비에 더 공을 들인다. 살피고 정성을 들이는 것은 마음의 속도이기 때문이다. 반찬을 담고 마음을 담고 도시락을 만드는 시간이 즐겁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면 꼭 한 번 돌아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작은 습관은 그날의 어긋남이 내게 남겨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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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도시락은 내게 다시 돌아왔지만 도시락보다 더 귀한 것은, 그 사이에 생긴 이야기다. 또 그 이야기를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진실과 조용한 질서와 배려가 있음을 안다. 삶은 종종 잃어버림으로 가르치고, 때로는 기다림으로 깨우치고, 아주 가끔은 예상치 못한 기쁨으로 삶을 감싸 안는다. 그날은 철학서에서 배운 많은 사유보다, 한 번의 작은 어긋남이 더 깊은 바다로 날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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