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가 밝았다
'붉은말의 해' 병오년, 2026년의 문이 열렸다. 새해가 온다는 말은 언제나 설렘보다 먼저 묵직한 성찰을 데려온다. 또 한 해가 지나갔고, 또 한 해가 내 안에 더해졌다는 사실. 세월은 그렇게 조용히 쌓인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그러나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게 한다. 요즘 나이가 든다는 말을 익어간다고 말한다. 그 어떤 것이 다가와도 덜 조급해지고 덜 흔들리며, 조금 더 나에게 관대해지는 쪽으로 삶이 기울어가기 때문이다.
박경리 선생은 말년에 쓴 시 "옛날의 그 집"에서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그 한 문장은 긴 세월을 다 충분히 건너온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담담한 용기다. 젊음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로 미화되지만, 선생은 오히려 모든 세월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편안함을 말한다. 갈 곳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는 고백에는, 욕망과 집착을 하나씩 내려놓은 뒤에야 알 수 있는 자유다.
박완서 선생 역시 나이 듦의 아름다움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냈다. 고무줄 바지를 마음 놓고 입을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은 것을 안 해도 괜찮아서 좋다는 말. 그 솔직함에는 삶을 힘껏 살아낸 사람의 지혜가 배어 있다. 젊을 때는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고, 증명해야 할 것 같고,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늘 긴장 속에 산다. 그러나 나이가 더해 갈수록 삶은 순해지고 느슨해진다. 그 느슨함 속에서 숨이 트이고, 돌아갈 여백이 생긴다.
두 작가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 삶을 마무리했지만, 그 결은 닮아 있다. 물처럼 살다 간다는 상선약수의 삶. 낮은 곳으로 흐르되, 스스로를 잃지 않는 삶. 세월이 가르쳐주는 잔잔한 교훈이다. 애써 높아지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다 보면 삶은 제 자리를 찾는다는 것. 나이 듦은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연습이다.
과일이 익을수록 단맛이 깊어지고, 술이 숙성될수록 향이 부드러워지듯, 사람 역시 세월을 통과하며 다른 향을 갖게 된다. 젊음의 향이 날카로운 풋내라면, 나이 듦의 향은 오래 두고 맡아야 느껴지는 은은함이다. 그 향은 속도를 늦출 줄 알 때 드러난다. 빨리 판단하지 않고 쉽게 단정하지 않으며, 다른 이와 잘 어우러지고 기다려주는 마음. 이것이 세월이 빚어내는 인간의 격일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즐거움은 사랑의 방식이 달라지는 데 있다. 누군가를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함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사랑으로. 젊을 때의 사랑이 불꽃이라면, 나이 든 사랑은 온기다. 크게 타오르지는 않지만, 오래도록 곁을 지켜주는 불씨 같은 것. 그 온기 덕분에 다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2026년의 첫 문턱에서, 아직 완전히 익지는 않았지만, 분명 어제보다는 조금 더 나아진 나로서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나이 듦은 끝을 향해 가는 길이고 삶의 결이 깊어지는 과정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익어가는 것이라 믿는 순간, 시간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ㄴ
새해는 또다시 나에게 시간을 건네준다. 그 시간을 어떻게 익힐지는 나의 몫이다. 조급함 대신 여유를 가지고 또 한 해를 맞이한다. 분명 더 좋은 향을 지닌 이가 될 테고 그렇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세월이 주는 따뜻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