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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잘 쓴 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어려운 주제도 일상 언어로 표현하여 모두가 쉽게 읽을 수 있는 글과 정확한 의미의 단어를 골라 간결하게 표현한 글이 좋은 글의 조건이라고 했다.
그에 맞는 예시로 한 친구는 정확한 단어를 쓴 작가로 롤랑바르트를 꼽았고, 일상 언어를 잘 쓰는 작가로 평론가 이동진을 꼽았다. 나는 어떤 글, 더 나아가 어떤 말이 좋은지 생각해봤다. 몇 년 전에 읽었던 이회창 전 총재의 대법관 시절 사법적극주의를 주장한 글이 떠올랐다.
개인의 업적, 인물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오직 그 글을 읽었을 때 받았던 강렬한 각인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찾아서 함께 첨부하려고 했는데 구글링을 실패했다...) 한자가 많이 등장했고, 같은 단어를 여러 번 반복했던 글이었기 때문에, 이 글이 떠오른 이유가 필력은 아니었다. 잘 쓴 글이긴 하지만 최고로 꼽기에는 애매하다는 의미이다 오해 마시기를..
그 글이 생각난 이유는 필력보다는 글에 담긴 힘,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이 믿는 주장에서 조금도 이탈하지 않았었다. 믿음이 분명했지만 독자에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문장은 유려하지만 글쓴이의 주장이 처음과 달라진 게 느껴지면 글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다. 여러 무술을 혼합한 초식을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정권만을 연마한 사람이 기억에 남는 경우랄까.
내가 읽은 그 글의 전문을 넣지 못하고 이런 글을 쓰는 게 읽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차단하는 것 같아 찝찝하다. 찾게 된다면 꼭 첨부해서 같이 읽고 싶다.
결국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쉬운 글, 간결한 표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필요한 것인 생각을 확실히 하는 것 같다. 작문보다 작심이 어렵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1장 1부 ~ p.48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아주 바쁘게 보내기 때문에 이야기할 기회를 결코 찾지 못한다. 그 결과 하루하루가 항상 깊이를 지니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되고 만다. 수년 후에는 모든 세월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당사자를 의문 속에 빠져들게 하고, 그 모든 세월이 흘러가버림으로써 안타까움에 젖게 하는 단조로움만이 하루하루를 지배하게 될 뿐이다. <p.3o>
내 이야기인 동시에,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시간에 정비례하여 스스로 만족할 성과를 만들어낸 사람은 많지 않다. 내 기준에서 무언가를 이룬 사람조차도 지나간 시간을 더 치열하게 살지 못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후회한다. 위 문장은 대부분의 시간을 바쁘게 보낸다고 시작하여 단조로움이 일상을 지배한다고 끝난다.
매일 바쁘지만 바쁜 이유를 모르고, 자신의 의지에 따른 바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장은 늘 내 상처를 들춰내지만, 상처에 적합한 약은 제공하지 않는다. 상처가 들춰질 때마다 며칠은 열심히 사니까 그게 나름의 보상이면 보상이겠다.
문제는 모터사이클 관리도 아니고, 수도꼭지도 아니다. 문제는 공학 기술로, 그들은 공학 기술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 애초에 그들이 모터사이클을 타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학 기술로부터 도피하여 시골에 가서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즐기려 했던 것이다. <p.43>
어렸을 적에 오래된 tv가 집에 있었다. 다른 tv로 바꾸기 1년 전부터 그 오래된 tv는 가끔 흑백으로 나오고, 화면에 절반이 초록색으로 나오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나는 tv 위를 손바닥으로 쾅쾅 쳐보고, 안될 때는 tv를 들어서 좌우로 흔들어댔다. 안테나를 빙빙 돌리다가 마침 화면이 제대로 나오면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안테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때가 9~10살 이였던 것 같은데 내부를 들여다볼 생각은 전혀 안 했다.
아버지나 형이 하는 행동을 보고 그대로 따라한 것 같은데, 비판적 판단이 결여된 삶은 그때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해결책의 유효성이 일시적이고 문제가 반복된다면, 일시적인 해결책을 반복하기보다는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고 다른 해결책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게 공학적인 태도를 지닌 삶이다.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하면 잊을게 뻔하니까 3일만 그렇게 살도록 시도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