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비구름이 몰려간 사이 오랜만의 햇볕이 반가워 뛰쳐나갔다. 콩벌레들이 많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어렸을 적엔 이것들을 자꾸만 건드려 동그랗게 만들어서 자주 괴롭혀댔던 것 같은데, 이제는 손가락을 대기는 좀 겁나서 나뭇가지로 툭툭 건드려봐도 모습을 바꾸기는커녕 도망가기 바쁜 놈들의 모습에 당황스러울 뿐이다. 바깥에는 콩벌레들 말고, 청량한 여름 햇살 아래 분홍빛 아리따운 꽃을 내놓고 있는 무궁화나무도 있었다. 초록과 분홍이 어우러진 그 나무는 예뻤고, 숭고했고, 무서웠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저 예쁜 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태웠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죽였을까. 무궁화는 영원과 일편단심을 의미한다는데, 대체 누구의, 무엇을 위한, 영원이고, 일편단심일까. 나는 모른다. 알 수 없다. 알고 싶지 않다. 이미 주어를 잃어버린 나는 곧 목적어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말을 잃을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생각마저 다 잃어버리고 나면 무궁화는 온천지에 예쁜 선홍빛을 내놓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맑고 짙은 분홍, 어쩌면 빨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