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수 Feb 05. 2018

페미니즘,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斷想

 우연히 빌리 카빈이란 가수의 ‘페미니즘’이라는 노래를 알게 됐다. “내가 남자라서 못 느꼈던 것들이지만 변화가 필요하다. 근데 우리나라 페미니즘은 잘못됐다.”라고 하면서 결국 페미니스트들을 욕하면서 끝나는 노래였다. 폭력으로 되찾는 정의나 평등은 숭고하지도 가치 있지도 않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고 맞는 말 같다. 근데 역사 속에서 폭력적이지 않았던 사회 운동이 있었던가? 일제시대 독립운동, 독재 정권 당시 민주화 운동이 마냥 평화롭기만 했나? 외국 사례를 굳이 가지고 올 필요도 없다. 그 당시 기득권층도 똑같은 이야길 하지 않았으려나? “폭력은 정당하지 않아. 평화로운 방식으로 해야지.”


 이 노래 가사를 쭉 읽어 보면서, 여전히 이 정도가 우리나라 일반 남자들의 인식 수준이구나 했다. 요즘은 여자들이 자기 이상형에 대해 말하거나, 남자에게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손 씻으라고 하거나, 출산의 고통에 대해 얘기하기만 해도 메갈이냔 얘길 듣는다던데, 어휴 참. 왜이리 다들 예민하신지. 여자들은 예쁘게 화장 하고 다이어트 해서 남자한테 선택 받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여자들도 똑같이 조신하고 잘생긴 남자 찾기 시작하니까 위기의식이 느껴져서 그러나?


 여자 페미니스트들은 “아직 저도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중이라, 제 얘기가 백프로 다 맞는 건 아니에요.” 하는데, 페미니즘을 네이버 댓글, 페이스북 같은 걸로만 봤을 남자들은 “우리나라 페미니즘은 틀렸습니다!! 올바른 페미니즘을 하세요!!” 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남자들 기분 안 거스르게 예쁘게 페미니즘 하라는 거지. 오빠가 허락하는 페미니즘 하라는 거지.


 나는 싫다. 그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든 여자든, 그 사람한테 예뻐 보이려고 페미니즘 하는 거 아니다. 사랑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20대가 되어서라도 페미니즘을 알게 돼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쓸 것이다. 나는 내가 얼마 전에 썼던 여성 영화 추천 글 같은,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글을 더 많이 쓸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페미니즘이야말로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수식어가 딱 맞는 것 같다. 가끔 이렇게 회의감도 들고, 화도 나지만 페미니즘을 몰랐다면 내 인생은 82년 김지영의 현실 버전이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페미니즘을 알고나서 사람들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나 자신을 더 아끼게 되었고, 더 자유로워졌다. 예쁘고 날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고,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정도 생겼으면 됐어. 우린 예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주게 되었다. 예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내 외모에 더 자신감이 생겼다. 불편하고 예쁜 것들보다, 편하고 자유로운 것들을 찾게 되었다. 늘 상냥하고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됐다. 무례한 언행을 하는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고 애 낳는 것 말고도 여자의 인생에는 더 다양한 행복이 있을 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며, 오히려 여자들이 내가 힘들 때 힘이 되어주는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세상엔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자들이 많이 숨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하는 페미니즘이 진짜로 잘못된 거라면, 나는 왜 내 인생이 점점 더 좋은 쪽으로 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걸까?




뜬금 없는 노래 추천.

제리케이 - #MicTwitter

“내가 여성차별에 대해 논하면 욕할 애들은 날 부르겠지 ‘보빨러’ 난 그냥 너희 전부보다도 생각의 속도가 백 보 빨러”




 

매거진의 이전글 남자들만 우르르 나오는 영화, 이젠 좀 식상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