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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앤선생님 Dec 25. 2021

돈 흘리고 다니는 며느리

돈 흘리고 다녀서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비밀스럽게 모은 돈을 아무 데나 흘리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돈을 흘리기 시작한 건 한 푼도 허투루 쓰시지 않는 시부모님 때문이었다. 시부모님의 검소한 생활습관 때문에 결혼 전부터 크고 작은 오해가 있었고 남편과 크게 싸운 적도 있었다.


결혼 전의 일이었다. 제주도에서 교육연수를 듣던 중 아주 달고 맛있는 귤을 파는 과일가게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친정과 예비 시댁에 제주도산 귤 한 박스를 부쳤다. 그 당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덕분에 맛있는 귤을 잘 먹었다."라는 말이 돌아오길 기대했었다. 그러나 예비 시댁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오빠, 어머님 아버님께서 귤 잘 드셨대?"

"음... 잘 드셨대. 근데 한 박스는 양도 많고 부담스럽다고 앞으로 보내지 말라고 하셨어."

나는 이 말을 시부모님께서 우리의 교제를 반대한다는 말로 받아들였고, 이 사건이 다툼의 씨앗이 되어 헤어지네 마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이 나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시부모님께 나를 인사시킨 자리에서 곧바로 결혼을 진행하게 되었다. 만약 그때 우리가 귤 한 박스를 두고 싸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시부모님은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귤 한 박스를 보내지 말라고 하신 게 아니었다. 워낙 검소하고 소식하시는 지라 두 분이 귤 한 박스를 드시기엔 양이 너무 많았고,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가 싫어서 선물을 받는 게 불편하셨던 거였다. 특히 시어머니는 선물을 받는 것보다 선물을 주는 걸 훨씬 더 좋아하셨다.

"며늘아, 돌려준 예단비는 잘 받았니?"

"네 어머님. 근데 돈이 더 들어있네요?"

"우리 아들이 센스가 없잖니. 괜찮은 가방 하나도 안 사 줄 거 같아서. 더 보태 넣었다. 갖고 싶은 거 사렴."

정작 시어머니 본인은 시장바구니를 들고 다니시면서도 내가 들고 다니는 허름한 가방이 눈에 밟히셨나 보다.

추석 명절에도 그랬다. 시어머님은 남편 몰래 내 주머니에 봉투를 찔러 넣어주시며 "쉿!" 하셨다.

"혹시라도 친정에 갈 때 빈손으로 가지 말고 맛있는 거 사가렴."

시어머니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나에게 10만 원, 20만 원씩 돈을 넣어주셨다. 그렇게 나에게 비밀스러운 돈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시부모님은 정말로 검소하셨다. 아무리 낡아빠지고 오래된 물건도 제 기능을 잃을 때까지 함부로 내다 버리지 않으셨다.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다. 시누이들이 아무리 좋은 옷을 사드려도, 좋은 음식을 사드려도 부담스러워하시기만 할 뿐 좋은 내색을 잘 표현하지 않으셨다. 나는 남편에게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오빠. 시부모님은 무슨 재미로 사시는 걸까. 식탐도 없으시고 물욕도 없으시고 아무 욕심이 없어 보이셔."

"음... 글쎄, 등산 다니는 재미? 손주 돌보는 재미?"

"에이, 설마 그럴 리가. 말씀은 안 하시지만 분명 갖고 싶은 게 있으실 거야..."

나는 남편 몰래 시부모님께 드릴 용돈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갖고 있던 돈을 더 넣었다. 남편이 알면 돈을 덜어낼게 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집을 살 돈을 모아야 하니까.



시댁에 방문하는 날. 나는 시부모님께 용돈 봉투를 드렸다. 그런데 용돈 봉투를 받는 시아버지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앞으로 용돈 주지 마라. 이렇게 올 때마다 용돈 봉투를 주면 부담스러워. 다시 가져가렴."

"저희는 괜찮아요 아버님. 올 때마다 쌀도 주시고, 고구마도 주시고, 김치도 주시고 다 주시잖아요. 이 정도는 드려야죠."

"아니야. 부담스러워. 우리야 말로 괜찮으니까. 다시 가방에 넣으렴. 어서!"

나는 쭈뼛거리며 용돈 봉투를 다시 돌려받았다. 남편도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우리는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차에 몸을 싫었다.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말려도 시어머니는 한사코 문 앞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해주셨다. 그리고 잠시 후 내 휴대폰이 붕붕 울렸다. 시아버님의 전화였다.

"네~ 아버님."

"며늘아, 신발장에 용돈 봉투를 두고 갔니?"

"네, 아버님. 제가 깜빡 잊고 두고 왔네요."

"아니, 잊어버릴게 따로 있지. 용돈 봉투 챙기는 걸 까먹었단 말이야? 내가 도로 가져가라고 몇 번 말했잖니."

시아버지께서 언성을 높이셨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안에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사실 까먹은 게 아니고 흘, 흘렸어요! 아이고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돈을 흘리고 다녔네요. 다음부터 조심할게요."

"뭐? 돈을 흘린 거라고? 하하하. 나참."

돈을 흘린 거라고 둘러대는 내 말에 시아버지께서는 황당한 웃음을 지으셨다.

"그래. 아무튼 고맙다. 잘 쓸게."

나는 "휴~."하고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는 어물쩍 잘 넘어갔다. 하지만 과연 다음번에도 시부모님 몰래 돈을 잘 흘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자연스럽게 흘리고 올 수 있을지 고민이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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